2020년 1월 12일 일요일

사랑초



 
베란다 창가에 키다리 선인장이 너무 크게 자라서 천장에 닿았다. 몇 해가 지나도록 가시 때문에 분갈이한번 해주지 못하고 영양제 조금 얹어주는 것을 받아먹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인장 화분의 생명력이 참 대단하다. 그뿐인가, 그 화분가장자리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사랑 초 역시 생명력이 대단하다. 해마다 예쁘다며 탐내는 사람들에게 몇 뿌리 씩 뽑아주어도 어느새 콩처럼 생긴 뿌리는 무성하게 번식을 해서 또 한가득 된다. 그런 사랑 초 꽃을 보면서 예쁘다는 말만했지 선인장 화분에서 더부살이하는 설음은 왜 알아주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큰맘 먹고 사랑 초를 작은 화분으로 이사를 시키며 혼자 중얼거렸다.
 
"사랑초야! 꽃이 많이 피어야 부부 금술이 좋아진다는데 새집으로 분가시켜 줄 테니 올해는 시들해진 금술을 회복시켜 주지 않으련?"
 
전화벨이 울린다.
 
"애기씨~! 오빠가 예‥."
 
오랜만에 걸려온 막내 올케언니의 전화 속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목소리를 듣자하니 두말도 할 필요가 없을 듯 했다,
 
"얼굴이나 보게 얼른 오세요, 언니!“
 
전화를 끊자마자 딩동 하는 벨이 울린다. 우리 집 앞에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무작정 여기저기 걷다보니 여기까지 왔다며 10km는 족히 넘을 거리를 걸어왔다고 한다. 차를 타면 못 찾아 와도 걸어서는 정신없이 걸었어도 잘 찾아왔다는 언니의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오빠와 올케언니가 연애하던 시절 차멀미 때문에 차 타기를 거부하는 통에 보통 사람들 평생 걸을 만큼 그때 모두 걸었을 거라는 말을 했을 정도다.
언니는 누구라도 붙들고 오빠 흉 좀 실컷 보고 싶은데 세상 사람들의 심리가 앞에서는 위로해 주는 듯 해도 십중팔구 뒷말에 새끼까지 쳐서 소문이 퍼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뒷감당하기 무서웠단다. 속만 끓이다가 만만하게 들어 줄 사람이 시누이밖에 없다고 먼길을 걸어서 찾아왔다는 말을 시작으로 서울 말씨와 경상도 사투리가 오가는 수다 가 시작되었다.
 
"잠도 잠 나름이지 품위 없이 체신 떨어지는 잠을 자면서 예…."
 
"품위 있는 잠은 뭐고 채신없는 잠은 뭐예요?"
 
"애기씨는 백날 얘기해도 모를 거라 예….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뭘 잘한 일이라고, 발로 차기는 우에되서 찹니까? 옆구리를 맞았다 아닙니까? 내사 첨엔 참았지만 서도… 도저히 이젠 못 참지 싶네요. 세상 시끄럽게 하는 코는 증말 미버서 코를 쪼께 아주 쬐끔 아프게 비틀었드만,... 사실 좀 아프긴 했겠지만 서도, 잠옷 바람에 쒜타 하나 걸치고 나가드만 새벽에 왔다 아입니까? 나 원 참! ''낀 놈이 썽 낸다고 그만 '저리 가라' 카면서 찼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예, 밤새 어데 갔다 왔는지 금방 잠들데 예! 자면서 내둥 무시 웅얼웅얼 잠꼬대를 우찌나 해대는지 이름도 내 이름은 안 부리고 소라라 카든가 보라라 카든가….분명 여자 이름 이라 예! 툭 쳤드만 이불 둘둘 말아 사타구니에 끼고 에구~ , ! 잠도 잠도 완존히 짬뽕 잠을 잔다니까 예. 내 오늘 예서 있을 랍니다. 안 갈랍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숨차게 쉬지 않고 푸념을 털어낸다.
서울로 시집와서 살기를 35년 이젠 그 사투리에서 벗어나도 좋으련만 같은 지역 사람을 만나거나 화가 나서 말이 빨라지면 더 심하게 해대는 사투리 때문에 가끔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밥 먹으면서 흉보고 커피 마시면서 흉보고 TV를 보면서도 흉보고 시장 보러 가면서도 또 흉보고 저녁 밥상을 치우면서도 가끔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투리를 섞어가며 오빠에 대한 끝없는 허물이 쏟아졌다. 정말이지 난 내 오빠가 올케언니에게 그렇게도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인줄 몰랐다.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오빠는 뽕 낀 놈이고 언니는 발로 차였다는 이야기를 그렇게나 오랫동안 풀어서 한 것이다.
오빠의 코고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고 말을 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식 모두 성장하여 부부만의 여유 있는 모습으로 깨가 쏟아지는 황혼을 살아내는가 했는데 한가하면 병난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 그런가보다 하는 나대로의 생각을 해보았다.

아직 초저녁인데 밤새 선잠을 잔 탓인지 아니면 아침부터 먼 길을 걸어와서 힘이 들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속에 있는 말을 모두 내뱉고 후련해서 그런지 TV를 보다가 소파에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다. 이불을 갖다 덮어주며 세월이 참으로 빠르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스레 올케의 잠든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리 곱던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검버섯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내 눈에는 살아온 세월의 보석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이런 언니의 마음을 지금에 와서 편치 않게 하는 오빠가 은근히 미워지기도 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오빠의 좋은 점 보다 허물만 들추는 올케의 불만 가득 찬 경상도 사투리의 굴곡 심한 말들이 귓속에서 윙윙거렸다. 우리 가족이 알기로는 오빠처럼 아내를 끔찍하게 위해주는 애처가도 없는듯한데 시누이는 시누이 심보가 있다더니 은근히 올케를 향해 미운 마음이 슬슬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기에 '으이구! 으이구!' 하며 자는 얼굴을 향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밤은 깊어가고 어쨌든 언니의 행방을 오빠에게 알려줘야 하겠기에 방에 들어가서 조심스레 전화를 했다.
 
"오빠! 잘 좀 하지, 언니 여기서 자고 갈 테니까 찾지 말라고 전화했어요."
 
"데리러 갈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안심하며 전화를 끊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 도착한 오빠를 보고 싱긋 웃는 언니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다정하게 말한다.
 
"밥은 아무 데서나 먹어도 잠은 내 자리에서 자야 편하데이~ 퍼뜩 가자….여보! 애기씨 집에서 하룻밤 자려 했더니 불편하네, 차 갖고 왔지 예?"
 
몇 분이면 도착할 것을 귀밑에 슬며시 키미테 까지 붙여주는 오빠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붙여봤자 아무 소용없다며 눈을 흘겨 주었다. 언니는 아무 말이 없다. 더 이상 흉볼 말이 없나보다. 더 웃음 짓게 하는 것은 언니의 행동이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큰 죄인의 목덜미를 쪼물쪼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루 종일 내 귀에 딱지 앉게 떠들던 그 말들을 본인은 모두 잊었나보다. 배웅하며 조수석 창문에 대고 언니에게 크게 말했다.
 
"언니! 오늘밤은 짬뽕잠 말고 부비부비 자장잠… 알았지요? 히히….“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사랑 초는 낮에는 빛을 받아 꽃잎이 열리고 밤에는 꽃잎을 오므리는 수면운동을 한다고 한다. 오늘 사랑초 에게 소원한 금술 회복은 성격이 사랑초를 닮은 언니와 그런 모습을 사랑하는 오빠의 몫이었던가 보다.
사랑은 그 이름만으로 행복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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