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문학관을 다녀와서
방주인
2020년 10월 20일 문학기행을 떠난다는 공지가 떴다.
이전에 코로나19로 인해 문학관 개관이 쉽지 않다고 일정이 한차례 연기되었기에 공지에 쓰인 참여 날짜를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삼성의료원 안과 시술 예약과 딱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참 곤란하게 되었다. 올 한해가 다 지나도록 제대로 된 수업도 받지 못한 터라 1년에 1-2회 주어지는 문학기행 마저 못 간다는 사실이 너무 섭섭했다.
대체 다 늙어 공부 좀 하겠다는데 바이러스까지 여러모로 비협조적이라고 툴툴대니 그 모습을 본 딸이 병원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당겨주었고, 다행히 나흘을 앞당겨 미리 눈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신바람이 나서 얼굴 반을 가릴 듯 커다란 안대를 찬 모습으로 더듬거리며 소풍 갈 준비를 하는 모습이 걱정스러운지 딸이 말한다.
“엄마 넘어지지 않게 등산스틱 짚고 가요.”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걱정이 되었던지 딸은 문학기행 당일 인천역까지 데려다주었다. 딸이 돌아간 후 꽃가게 모서리에 서서 살그머니 안대를 풀었다. 세상이 환하다. 횡단보도를 건너 역 광장에서 무사히 교수님과 서정원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잠시 후 시 사랑방 회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내가 건너왔던 인천역 맞은편에는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커다란 아치형 입구가 중국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라도 써넣고 싶으리만치 완강히 버티고 서있어서 정작 역의 깔끔한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느낌이었다.
9명의 시 사랑방 마스크부대가 모두 모였고 인솔하시는 시몬님을 중심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첫 번째 코스인 한국근대문학관을 향해 걸었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띵오하~ 일색이다. 아마도 그곳은 중국 사람들의 땅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느릿하게 중화거리를 지나 한국 근대 문학관 앞에 도착했을 때, 입구 건물 벽에는 우리를 반기듯 이렇게 쓰여 있다.
“별 많은 밤
하늬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짖는다.”
백석, [청시]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처음 지어진 창고로 100년 세월의 물류창고를 인천시와 인천문화재단이 인문학적 관점에서 문학박물관으로 재조성한 곳이라는 설명이 입구에 안내 되어있었다. 이곳에는 무려 3만 점에 가까운 근대문학의 자료들이 갖춰져 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전시를 보러 들어가기 위해서 다들 QR 코드를 찍고 체온도 쟀다. 그렇게 다들 별 탈 없이 입장이 이뤄지고 있던 중 하필 나만 주민등록증을 내라고 한다.
젊은이는 입장료를 내라고...ㅎㅎㅎ
그렇게 젊은이는 주민등록증을 확인받고 단체입장 팔찌를 전달받아 총무님에 전하는 임무를 완수한 뒤 무사히 입장을 마쳤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최남선, 한용운, 김소월, 나도향, 현진건, 백석, 염상섭 등 문인들의 귀한작품 자료들을 한꺼번에 조우할 수 있었다.
입구에 들어와 우릴 맞이해준 작품은 신소설 ‘혈의 누’(이인직)와 ‘자유 종’(이해조)의 초판이었다. 그것을 시몬님이 손으로 가리키며 간단히 설명을 덧붙여주셨다.
하지만 단체관람이었기에 전부 느긋한 마음으로 자세히 관람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쉽지만 후에 가족들과 다시 방문해서 여유롭게 돌아보기로 다짐하며 한국 최초의 국한문 혼용서인 유길준의 ‘서유견문’ 초판이나 염상섭의 ‘만세전’ 초판 등 빛바랜 희귀본들은 사진으로만 남기기에 바빴다고 느꼈을 정도로 스치듯 보고 지나쳐야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었다. 김소월 시인의 특이한 글씨체는 나도 그런 글씨체로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다 다 같이 멈춰 서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곳은 초판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왔던 책들의 역사를 보여주듯 전시된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인 이광수의 ‘무정’ 앞에서였다. 무정의 역사는 그 두께도 크기도 제각각이라 전시해 놓으니 제법 멋진 모습이 되어있었다. 정작 소설 자체는 옛날에 읽었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신다는 분도 계셨고 다시 읽겠다는 분도 계셨기에 재밌는 기분이 들었다.
문학관 상설 전시장에서는 시대별 문학의 변천사와 주요 작품들 계몽기, 근대문학의 태동기, 김소월과 한용운이 활동했던 시기와 함께 사회 부조리를 꼬집었던 문인들의 시와 소설 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있었다. 그중 내 눈길이 닿은 곳은 문인들의 얼굴을 벽 한 면에 모아놓은 곳이었다. 굉장히 많은 문인들의 모습이 마음 저 안쪽에서부터 알 수 없는 벅참을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허나 저 많은 얼굴을 기억 할 수도 없고 얼굴을 익혀서 뭐하나싶은 마음에 초상화 같은 사진은 촬영하지 않고 패스~
그러던 중 격동기 서민의 삶을 소재한 영화를 정해진 시간마다 상영한다는 안내판을 보고 총무님의 요청으로 소극장에 들어갔다. 스크린을 향해 단체 사진을 찍고 얌전히 기다렸지만 준비 미숙으로 여기도 패스~ 너무 아쉬운 일이었다.
2층 체험 공간에는 1층에서 만나본 시대별 주요 작가의 모습이 새겨진 스탬프가 마련돼 있어서 이것저것 스탬프를 찍어보다 다들 기다리고 있고 한번 찍는다는 것이 거꾸로 찍어서 미련없이 포기했다.
한바탕 전시를 둘러보고 나니 점심시간이다.
여행의 참맛은 뭐니 뭐니 해도 먹는 것, 먹는 게 남는 거다!
점심은 우리나라 짜장면을 최초로 만들었다는 공화춘에서 먹기로 되어있었다. 그곳으로 가기위해 작은 언덕길을 넘어서 우회전으로 걷고 좌회전으로 걷고 내려가고 올라가고 걷다가 전병 파는 가게에서 서 시인님이 감사하게 전병을 한개 사주셨다. 체력 저질인 내가 지쳐가던 중에 단비를 만난 기분이었다. 기운 뿜뿜!
안내받은 공화춘 룸 회전식탁에 모두 함께 둘러앉았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다.
각자 준비해온 간식을 회전 식탁에 올려놓은 후 주문한 야채탕과 탕수육, 짜장면 등 풍요로운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들 짜장면 드시는 가운데 홀로 우동을 먹다 보니 죄송했다.
답답한 마스크를 벗는 것으로 시작된 우리의 식사 시간은 행복한 기분과 훌륭한 음식,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한데 모여 한 장의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서민들의 단골 메뉴인 짜장면을 처음 만들어 보급했다는 공화춘에서 점심을 배불리 먹고 다음 견학장소인 짜장면 박물관에 들어갔다.
또다시 QR 코드 찍고, 체온 재고. 똑같은 절차를 거쳐 모두 들어가는데 어김없이 또 나만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한다.
“젊은이 나이 67살입니다.” 라고 말하며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니 검사하는 사람도 나도 서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짜장면 박물관은 그 이름답게 개항기 인천에서 탄생해 한국 100대 민족문화 상징의 반열에 오른 짜장면의 역사와 문화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입구에 우리나라 배달음식의 대표 짜장면은 세대가 바뀌어도 사랑받는 음식으로 하루 평균 700만 그릇이나 팔릴 정도의 인기 있는 음식이라는 벽보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짜장면을 나는 어릴 때 느낀 시커먼 색깔 때문에 계속 싫어했었고, 지금은 가끔 먹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웬만해서는 먹고 싶지는 않은 편이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오니 최초의 중국집, 공화춘의 낡은 간판부터 역사, 짜장면 전성시대의 모형들이 즐비하다. 졸업식 날 꽃다발과 졸업 홍두깨를 들고 짜장면 집을 가는 것이 최고의 외식이었던 비하인드 스토리 등이 그 시대로 돌아간 것처럼 모형으로 만들어져 전시가 되어있었다. 모형들 중에서는 손으로 면발을 만드는 수타 치는 모형은 참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 외에도 까만 짜장 소스의 레시피, 철가방의 변천사까지 머지않은 추억에 남아있는 실물들이 전시되어있었다.
내가 제일 흥미로웠던 곳은 밀가루 종류 전시였다.
문득 고등학교 3학년 때 집안 형편상 졸업 전에 취업 나갔던 친구가 떠올랐다. 형편을 아시는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농협에 취업했던 친구였는데, 그 노고를 저버리고 어린 나이에 일찍 7대 독자인 남자를 만나 원치 않는 혼전 임신을 했고, 남자 쪽 부모님들은 아들을 낳으면 결혼을 시켜준다고 했지만 친구는 딸을 낳았다. 결국 시어머니에게 쫓겨났다는 소식을 또 다른 친구에게 전해 듣고 찾아간 곳은 금호동 산비탈 판자촌 작은 방이었다. 아기를 데리고 산후 조리도 못한 채 퉁퉁 부은 다리를 하고 있었다. 친구를 붙들고 서로 울음 터진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 대체 왜 그랬니? 나도 잘 모른다, 친구는 장녀로서 홀 엄마와 남동생까지 세 식구를 보필하며 살아가는 힘든 상황이 너무 힘들어 학교에 다니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전부 지겨워지고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들의 만남은 버스 정거장 앞에 제화점 사장이 친절을 베풀면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때 친구의 방을 나와 금방 무너질 것 같은 붉은 진흙 낭떠러지를 바라보니 아찔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아카시아나무에 매어있는 주황색 빨래 줄에 곰표 밀가루, 무궁화표 밀가루라고 파란색, 붉은색 글씨가 적힌 헝겊이 몇 장 널려있었다.
”저건 뭐니?”
“우리 딸 기저귀야.”
그 말을 듣고 친구도 아기도 너무 불쌍해 몸속에 있는 70%의 물을 눈물로 모두 뽑아낸 것처럼 집에 돌아와 몸살을 앓았다. 그때 나를 힘들게 했던 친구 딸의 기저귀와 같은 곰표 밀가루 자루가 바로 짜장면 박물관에 있었다.
하찮은 것 같은 밀가루 자루가 짜장면 박물관에 전시되어있지 않았다면 잊고 살았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친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움이 밀려오는 날이었다.
짜장면 박물관을 나서서 다음으로 향한 곳은 한중문화관이었다. 인천화교 역사관이기도 한 이곳은 차이나타운 안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한.중 문화예술 기획공연과 중국문화 교류 관련 유물 전시, 그리고 치파오 칠교놀이 등 여러 중국문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문화예술 기획공연은 중단된 상태였기에 그저 여러 전시물을 사진에 담으며 스치듯 지나쳤다. 중국문화 체험은 가능했기에 회장님과 김 정옥님은 치파오를 입어보시고 포즈를 취했다. 흥에 휩쓸려 나는 나서서 사진사가 되었다.
띵오하~~
웃음꽃을 피우며 우리는 어느새 많이 친해져있었다.
하지만 즐거운 기분을 되돌아보며 드는 생각은 분명히 대한민국임에도 ‘인천은 우리가 접수한다.’라고 외치는 중국의 교만이 깔려있는 것 같은 불길함이었다. 뭔가 빼앗긴 땅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중국 부호들이 야금야금 사들인 우리의 땅이 적지 않다는 것이 그저 걱정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커피타임을 가졌다.
유일하게 모자를 안 쓰셨던 서 시인님은 개인적인 이유로 먼저 일어서셨고, 내 앞을 걸어가며 방귀를 자꾸 뀌시던 최 시인님은 커피타임을 마다하고 먼저 가셨다. 남은 이들은 고즈넉한 커피숍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인생의 시름 섞인 푸념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시간은 자꾸만 흐르는데 과자와 건과류, 귤, 감등 간식이 우리네 가방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는 것은 모두 집에 돌아가기 싫다는 것이었을까? 여러모로 아쉽기도 했지만 그만큼 즐거웠던 하루였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한 페이지의 추억을 만들며 즐거운 문학기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시 사랑방 회원님들 먼 길 걸으신 기행의 선물로 좋은 시 많이 쓰시길 마음으로 기원하면서 즐거웠던 기행일기를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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