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을 한다. 실제로 내 자신을 생각해보더라도 조그마한 일에 노여워하고 쉽게 토라지는 등 어린아이같이 행동하는 모습에 나 스스로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오랫동안 쳐다보다가 출근하는 남편을 뒤따라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나서면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는 죄송스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함이 분명하다. 옳지 않은 행동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지만 억지로 입을 있는 대로 빼물고 말 한마디 못한 채 고개만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출근길을 바라본다.
일과 연결되어 차마 거부하지 못하여서 라는 핑계를 대고 빗속을 가르고 나이트클럽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한 두 번 가보았던 곳을 30여 년만에 간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깊이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젊은이들이나 가는 곳이려니 하고 알고 있었다. 그런 곳에 갈 기회도 없었지만 가고싶다는 생각도 해 본적이 없는 그곳을 얼떨결에 중년의 여자 다섯 명안에 끼어서 겁 없이 그곳에 들어갔다.
절대로 나이트라는 나라에는 경제위기로 힘든 사람들은 없다. 밖에 비가 오든 천둥이치든 집채가 떠나가든 알 턱이 없다. 먹고 마시고 흔들고 모두가 행복한 웃음만이 있는 나라다. 마음은 금방 20대로 돌아가 있었고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교만하게도 나 자신 스스로 젊게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지천 명을 살아낸 내가 어느새 30대로 전락하여 부킹이라 일컫는 교제의 시간도 주어지고 어느덧 30대 젊은 남자들과 반은 반말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주위 사람들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각 개인의 감추어진 끼나 유흥 적인 면이 이런 경우가 닥치면 가감 없이 드러나게 된다. 마치 억눌려 있던 용수철이 퉁겨 올라오듯이 감추어져 있던 인격이 불쑥 드러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나름대로 고상한 척 하려고 했었는데 순식간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 앞으로 나가. 흔들어...춤을 춰!'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그 무언가가 나를 조정하는 것 같았다. 일행이 손을 잡아 끌었다.
:어서 일어나요. 즐겁게 놀자구~"
"에잇 모르겠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춤을 출 거야. 하나님 오늘만 눈감으세요."
이미 내 마음은 내가 아니었다.
한때는 사회나 가정에서 큰일들을 성취해내기도 하고 존경받던 날이 내게도 있었건만 저들 앞에 나이 값도 못하고 성숙치 못한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부비부비 춤까지 추며 환락의 시간을 즐겼다. 대체 왜 그랬을까? 즐거움은 잠시, 시간이 흐르다보니 내 정신이 차츰 돌아왔다. 동행자들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며 겁이 덜컥 났다. 나를 돌아다보았다. 엎어졌으면 뒤집히지나 말든지 시간이 흐를수록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나를 채근했다.
과감한 행동들 앞에 간담이 철렁 내려앉는다. 순간 무서운 세상의 뉴스거리도 생각나고 이성 앞에 두려움도 앞서고 더 이상 시간이 흐르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숨기고 싶은 순간들, 감추고싶은 몇 시간의 행적은 남편에게sos를 청함으로 이실직고되었고 내가 배신한 것인지 일행들이 배신한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돌아왔다. 남편의 뒤를 따라 걷는 내 꼬락서니는 마치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저승사자를 따라가는 망자의 모양새다.
"에구! 신경질나라."
"늬 똥 밟았나... 입 다물어라!"
어느 누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줏대 없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자체에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내면의 성숙이 오늘 잠시 멈추었어.
아니, 후퇴했어.
아냐! 이게 내 모습이야.
한번쯤 망가지고 싶던 날이 나에게도 있었어.....
저 양반 그늘 아래서 한번쯤 이렇게 퉁겨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좀더 젊었을 때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잘 한 거야! 혁명, 대 혁명이지. 흐흐흐!!)
여기까지 생각할 즈음 깜짝 놀랬다. 그이는 내 생각까지 꿰뚫고있었다.
"그래, 고따구로 해 보니 소원 성취 됐나! 젊도 늙도 않은 것들이 뒤엉켜 꾸겨져서 놀아보니 만족 됐나? 노는 행우지 들이 껍데기는 멀쩡해도 뱃속 깊숙이 들여다보면 쌘 노랗게 썩은 기라... 실패한 사람들이 맞지 싶다. 그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그리 소원 이었나? 다시는 활동 마라. 이제는 밖에 얼씬도 말고 손들고 무릎꿇고 반성해라!"
어떤 말을 해도 아무 대답도 못했다.
그 뿐 인가. 일행들에게는 남편의 출현이 빅 뉴스가 되어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고리타분하게 이조 백자, 고려 청자시대 여성도 아니고 남편에게 안겨 가다니 어린아이냐는 자유부인 들의 비아냥거림 전화가 빗발쳤다. 그렇지만 개인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을 내 잣대에 맞지 않는다고 뭐라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나 역시 남의 눈에 티만 보일 뿐, 내 눈의 들보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을....
"분위기가 무서워서..."궁색한 변명을 했다. 배신자가 감수해야하는 몫이다.
나 나름대로 대인 관계의 균형을 똑바로 잡고 두루두루 완숙에 도전하는 인격을 갖추려고 했었는데 순간의 쾌락 앞에서 그 균형이 삐거덕거리고 말았다니 생각만으로도 부끄럽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나도 인간이기에 솔직히 잠깐동안 미쳐서 춤추던 순간만은 즐거움으로 남아있다. 늙으면 어린아이가 된다더니 철딱서니없는 행동을 하고야 말았으니 반성하는 의미로 될수 있으면 조용히 있으려고 평소에 안보던 드라마를 틀어놓고 보는데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말없는 분위기를 깨우려고 애견을 안으면서 "시월아! 사랑해" 했더니 "끄~응" 한다.
남편에게 말했다.
"시월 이가 사랑한다는 말을 알아듣고 끙하고 대답했어." 아무 대꾸가 없다.
"시월 이는 내가 안아주면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저를 사랑하는 거 다 알아차리고 끄~응 하고 어리광한다니까...?" 또 아무 대꾸가 없다.
"요즘은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사랑한다는 말을 참 많이도 하든데 평생에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못 들어본 여자는 세상에 나 밖에 없을 거야!"
말을 해 놓고 보니 정말 그렇다.
그이도 이제서야 알아차렸는지 말한 사람 민망하게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하는 말,
"당신이 날 사랑한다며..." 너무 웃기는 대답이다.
"뭬 라고요?"
"늬도 안아주면 시월이 같이 끄~응 하드만, 말 안 해도 다 알아듣는 거 아니가.?"
"내가 강아지예요?" 반성하는 기간임을 망각한채 날세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강쥐 쌔끼가 왜 생트집이고~ 나이트 클럽 한번 더 가고 싶나?" (버럭!)
"깨갱~ 깨갱~"
에~구!! 조용히 입다물고 있을 것을 잠자는 사자 코털 건드린 영락없는 강아지 신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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