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7일 토요일

엄마 아버지의 사랑



if,
훗날 저 세상에서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햇빛 쨍쨍한 강가 모래사장이면 좋겠다. 아버지는 투망을 던지고 어머니는 양동이를 들고 나는 그곳에서 웃고있었으면 좋겠다.

오늘처럼 눈 내리는 밤은 어머니 떠난 생각에 마음이 메어온다. 
창문을 열고 얼굴이 붉어지도록 밖을 내다보았다. 

“아버지 난 눈이 내리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강아지 새끼처럼 그렇게도 눈 내리는 것이 좋니? 잠깐 마당에 나갔다와라.”


먼 옛날 추억속 아버지를 조르던 아이의 모습이 마음속에 그대로인데 아버지도 엄마도 모두 떠나고 나는 고아가되었다.
엄마 떠나신 동짓달 초나흘은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생신 날이다.
 본향으로 돌아가셨으니 생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라도 자꾸만 연관 지어보고싶다.
 너무 다정했던 분들,
'아버지 생신에 엄마를 초대 하신것일까? 그리운 내 아버지! 그리운 내 어머니!

너무 외롭다.
나만 불행한 것 같은 느낌.
많은 사람들 중에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라던 아버지 말씀을 되새김 해본다.
아버지 말씀대로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내 부모님처럼 긍정의 힘으로 잘살아낸 인생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길 소망한다.

그래!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2005년 12월 24일 토요일

어머니 소천



내 어머니는 그렇게 떠나셨다.
 
2005년의 하늘은 내게 모든것을 모두 빼앗아간다.
 
먼 미국의 하늘도 대한민국의 하늘도 내게는 없다.
 
난 아직 엄마를 보내드릴 수 없다.
 
마음만 따라 가고 싶을 뿐.

2005년 12월 7일 수요일

시츄 입양

저녁나절 아직은 어려 보이는 떠돌이 시츄가 우리 집에 오게되었다.
집 근처 대학교 맞은편 복권 방 아저씨가 먹다 남은 피자 조각을 주면서 털이 뭉칠 대로 뭉친 강아지에게 말한다.

"먹고 저리 가라! 학생손님들이 네놈 때문에 안 들어온다."

일주일째 길에서 헤매고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복권 방 기슭에서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안을 기웃거리면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쳐다본다고 했다. 상상하기로 아마 주인이 복권을 사러 많이 드나들었던가 아니면 옆에 피자 집을 많이 다녔던가 그 장소에 버려졌던가….
그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추운 날씨에 거의 보름동안 자동차 밑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다. 아무튼 안쓰러웠다. 개 좋아하면 데려다 기르라는 복권방 주인의 말대로 웬만하면 데려다 기르겠지만. 집에 있는 두 마리도 표현하기 좀 뭐 하지만 정이 들을 대로 들어서 그야말로 이제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녀석들을 볼 때마다 다시는 동물에게 정주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터라 고개를 내 저었다.

그랬는데….
저녁이 되니 눈이 내리고 그 떠돌이 강아지가 눈에 밟힌다. 그렇다면 오늘만 데려다가 집에 털 깎는 기계가 있으니 뭉친 털이라도 깎아주자 하는 생각에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다시 길거리로 내 놓으려니 안타까운 마음에 보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목욕 시켜서 병원에 데려가 예방주사 맞혀 데리고 왔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남편 하는 말, 있는 놈도 없애라니까 버려진 개까지 주워 온다고 싫은 내색을 한다. 내다 버리라고 호통이라도 치면 어쩌나 하고 눈치보면서 말했다.

"사내 녀석이야…! 숫놈…!

"내가 아들을 낳고 싶다고 했지 개새끼 숫놈 주워 오라 했나?"

순간 아들 없는 것이 나만의 큰 잘못인양 어깨가 옴츠려든다. 그런데 이 녀석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그이에게 우~우~웅. 무슨 의사표시를 한다.

"어, 이 녀석 말하네…?"

늙은 두 녀석은 방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사람이 웬일로 번쩍 안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문지방에 턱 고이고 쳐다보는 두 녀석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고있네,'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음력으로 동짓달이니 이름은 동지라고 부르자 했더니 나를 흘깃 쳐다보며 한마디하는 남편,

"어이구! 개 엄마 한동안은 또 개소리만 하시겠네!"

다행히 갖다 버리라는 말을 안 한다.
오늘 이렇게 새 식구를 받아들이고 행운의 숫자 7(일곱) 식구가 되었다.
우리 집에 입양인지, 입주인지 하게된 떠돌이 강아지 동지 입장에서는 행운일수도 있겠지만 그 녀석의 재롱을 보게된 우리가족은 가끔씩 순간의 행복을 느낄 것이다.
네잎 Clover의 꽃말은 행운, 세잎 Clover의 꽃말은 행복이라는데 Clover라는 낱말 안에 'love'를 품고 있어 서란다. 작은사랑이라도 사랑 안에서만이 행운도 행복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굿이 불행해야 할 이유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떠돌이 강아지 동지가 깨우쳐준 마음의 변화, 이해가 가기 전에 계획하고 깊이 생각하고 기도한 후 새해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꼭 닮은 아들을 입양할 계획이다.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차고 흥분된다. 왜 진작에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나 자신이 행복을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련다.
.

2005년 11월 29일 화요일

하늘 부


그대 하늘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에 휴대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도대체 몇 번을 불렀을까.
14년전 헤어진 아이들 아버지다.
가뜩이나 잠이 오지 않아 와인을 한잔 마시려고 하는 중이었는데 사람을 더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집이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어디세요 물으니 가락시장 앞이라고 걸어가며 전화를 하는 듯 음성이 흔들린다.
부부 다툼했느냐고 하니 아니라고.
차를 잘못 탔느냐고 하니 그렇다고.
나는 계속 질문을 했고 그는 단 답으로 대답을 한다. 울고있는 것인지 걷느라고 숨이 가뿐 것인지 한참동안 아무런 말없이 숨소리만 들리는 전화기를 붙들고 그렇게 있었다.

"할말없으면 끊어요."

착 가라앉은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참았다가 터진 흐느낌이 묻어있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전철을 타고 집에 들어가는 길인데 깊이생각을 하느라고 두 정거장을 더 지나쳐서야 내렸다고 했다. 끝내 흐느낌과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들이 보고 싶다는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저려왔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

그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목이 메이다못해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 내 모양새를 행여 라도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이들 보고 싶으면 보면 될 것을... 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담담하게 말을 했지만 사실은 얼굴 위로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주르륵 턱 밑으로 떨어졌다. 돌리다말고 놓아둔 와인 병마개의 팽창된 콜크 주둥이가 꼭 내 목구멍처럼 느껴졌다. 이상해진 내 목소리를 그에게 들킬세라 전화기 충전 시켜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끊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어젯밤 그의 떨리듯 울먹이는 목소리와 힘들고 지쳐있는 모습을 사진 보듯이 떠올리면서 마음도 다스릴 겸 사진기를 들고 아파트 뒤 낮은 산자락을 향해 올라갔다. 봄맞이꽃이 활짝 피었다. 

봄맞이는 앵초과 한해살이풀로 전국의 낮은 산기슭이나 들판, 논둑 같은 약간 습한 곳에서 자란다. 둥근 반원형모양의 잎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고 10cm정도 긴 꽃자루 끝에는 1cm 남짓한 작은 꽃자루가 다시 돌려 붙어있었다. 그 끝에 4-10송이씩 흰 꽃이 피었다.
봄맞이와 애기 봄맞이는 비슷하나 애기 봄맞이는 애기라서 그런지 털이 없다.
자료를 찾아보니 앵초과의 식물들에는 트리테르페노이드 사포닌이 들어 있어서 예로부터 민간에서는 애기 봄맞이나 봄맞이의 전초를 달여 폐결핵이나 인후가 아플 때 또는 찢긴 상처에 바르기도 하고 마시기도 한다고 적혀있다.

오늘 근심 걱정 모두 벗어버리고 작은 풀꽃과 더불어 하루를 살았다. 봄맞이와 애기 봄맞이를 모두 만났으니 내 마음상처에는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발라야 치유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는 하지 않으련다. 이미 좋은 생각에 나를 기대어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으므로...
그를 위해 기도한다.
하루속히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소원한다.
문자를 보냈다.
힘내세요.'

2005년 11월 24일 목요일

잊을수없는이름 구리

사업장 문을 닫고 우리 가족은 보금자리를 잃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져 집을 정리해야 할 상황이 되면서 난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였습니다. 10평 오피스텔 작은 거처를 임시로 마련했지만 애완견 2마리와 함께 기거 할 수없는 곤란한 상황이라서 여러모로 궁리를 해보아도 가슴 아픈 일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헤어져야 하는 현실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주변에서 산목숨을 향해 매정하게 하는 말은 마음에 상처를 더하기하다 못해 곱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저기 의탁하고 의뢰하고 부탁해 보지만 녹녹치가 않습니다. 다행이 생각 좀 해보겠다던 오빠의 승낙이 전해오고 고마움과 죄송한 마음으로 두 녀석을 데리고 길 떠날 준비를 했지요. 사료와 아이들 집, 몇 개 안되는 장난감과 옷가지를 대충 챙기는데 애들은 우리의 헤어짐을 알기나 하듯이 불안해 보였습니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해주는 길을 두 시간쯤 달려서 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강원도 홍천 깊은 산속에 위치한 교회 수양 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오빠가 관리인으로 숙식을 하고 계신 오빠의 직장입니다.
 
달려오는 동안 뒷좌석에 앉아있던 바리와 구리는 차멀미를 하고 눈물까지 흘리고 있고 안스럽고 불쌍해서 오빠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울기부터 했습니다.
 
 
 
8년 전에 차들이 쌩쌩 달리는 4차선 아스팔트 중간에 앉아 벌벌 떨고 있어서 교통사고 날까봐 데리고 왔다며 음식배달 오토바이 아저씨가 우리 사무실 마당에 내려놓고 간 아이 입니다. 길을 잃었는지 버림을 받은 아이인지 모르는 상태였고 며칠을 굶었는지 배는 홀쭉하게 달라붙었고 생김새도 특이해서 강아지인지 너구리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고 겁에 질린 듯 벌벌 떠는 모습이 안타까워 타월로 감싸 안으니 얌전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강아지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너구리라고 합니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보니 의사도 고개를 갸우뚱 하시고 확답을 안하시더라고요.
 
너구리보다는 귀가 크네요. 어차피 너구리도 개과이니 그냥 키워 보세요.“
 
기본검사 후 생후 1년 미만이라는 이 아이를 목욕시키고 예방접종을 하여 데리고 와서 가족들에게 소개를 시켰는데 온 가족이 만장일치로 찬성하여 우리 가족이 되었답니다. 이름은 자연스럽게 너구리에 너를 빼고 구리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렇게 가족으로 받아 들인지 8년이 되었지요.
 
13년 된 반려 견 바리는 아빠처럼 동생처럼 구리를 잘 보살펴주었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심장이 약하여 잘 놀랬고 내 품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는 얌전한 마마보이였답니다.
 
오빠와 아이들에 관한 이런저런 부탁을 했지만 오빠가 두 녀석 모두를 거두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한 녀석만 두고 가라는 말에 다시 데려갈 수도 없고 두 녀석 중에 나이 먹고 늙은 바리만 다시 데리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오빠가 잘 돌봐 준다고 했지만 겁 많은 구리를 혼자 떼어놓는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습니다.
 
마음이 찢기는것처럼 아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오빠 구리가 심장이 약한데 큰 목소리로 혼내지 말고 잘 챙겨줘요. 정리 되는대로 데리러 올게요. 미안해 오빠!“
 
 
 
사랑하는 구리와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말 못하는 아이를 향해 비굴한 변명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조용한 이곳은 너의 심장도 튼튼하게 만들어 줄 거야. 잘살고 있어 구리야! 엄마가 형편이 나아지면 꼭 너를 찾으러 올 테니까.“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는 구리를 오빠에게 부탁하고 차 시동을 걸었습니다.
 
헤어지는 것을 눈치 챈 아이가 발버둥을 치며 따라 오겠다고 울부짖는데 오빠가 점퍼를 열어 가슴에 꼬~옥 안고 나를 배웅합니다.
 
구리를 뒤로하고 늙은 바리만 데리고 돌아오는 마음이 형용 할 수없이 무겁고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이 선택이 최선이었고 차선의 방법은 없었어요.
 
 
구리야~
 
사랑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세상 끝 날까지 책임 질 수없는 엄마를 용서해라.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오빠와 나는 서로의 생사만 확인하며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늦은 시간에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안부를 묻기도 전에 오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리는 편하게 잘 갔으니 가슴에 묻고 좋았던 날들만 추억하면서 살도록 해.“
 
 
아직 함께 살수는 없지만 만나서 안아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세상에서의 이별은 이렇게 아쉬움만 남기고 소리 소문없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행복한 동행을 기원하면서 살아온 8.
 
그리고...
 
9개월의 이별을 아픔으로 남기고 나의 구리는 그렇게 무지개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구리야~~
 
대신해줄 수 없는 고통이지만 가까이에서 마음을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구리야.
 
엄마는 하늘만큼 땅만큼 구리를 사랑했단다.
 
사랑받지 못한 기억은 모두 잊어주기로...
 
사랑받던 순간들만 기억하기로 하 자.
 
엄마는 구리때문에 많이 행복했어.
 
오늘도 가슴속에 묻어놓은 너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리움을 달래련다.
 
우리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는 그때까지 항상 엄마 지켜주고 매일매일 새벽기도시간에 만나는 걸로...ok?
 
구리야~~
 
평안하게 잘 자거라.
 
사랑해!“
 
 
불러도 대답 없는 기억 속에 이름 구리에게 편지 한통을 보내며 그 이름을 기억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