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힘내세요. 언니는 힘든 글을 쓰셨는데 달래는 언니의 글을 보면서 아픔까지도 샘이 나고 때로는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해요.
언니의 글이 없는 날은 이곳을 하루종일 들락거리게 된답니다.'
언니의 글이 없는 날은 이곳을 하루종일 들락거리게 된답니다.'
몇 해전 어느 공개일기장에 일기를 쓸 때였다. 나의 이름은 보리 그녀의 이름은 달래 둘 다 촌스럽지만 정감 있는 이름이었다. 남편의 외도로 터져 나갈 것 같은 속내를 남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일기는 부끄럽게도 하루도 빠짐없이 톱 자리에 올라와 있었고 댓 글은 원 글의 몇 배씩 달렸다. 학교 다닐 때 성적이 그러했다면 아마도 하버드대학에서 장학생으로 보 쌈해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지금은 불법이라 할 수 없는 음악파일도 내 마음대로 소스를 만들어 슬픈 글에는 슬픈 음악을 바람난 남편을 미행하는 스릴 있는 글에는 나름대로의 영화음악을 첨부하였고 내 마음이 청승맞게 느껴지는 날 신세타령에는 울밑에선 봉선화를 삽입해 틀어놓고 눈물을 흘려 가면서까지 나를 추스리는 방편으로 인터넷을 이용하고있었다. 여러 장르의 음악과 그림까지 여기저기에서 스크랩 해다가 공부 잘하는 모범 학생이 된 듯 정성을 다해서 글을 올리면 하루 몇백의 클릭수가 올라가고 거기에 심리학, 철학, 신학, 의학의 강의가 댓 글 창에 펼쳐진다. 어느 변호사는 법적인 해결책을 메일로 보내 주기도 했고 지금은 손을 씻었지만 자신이 조폭 이었었다며 요청만 하면 힘으로 맛을 보여 줄 수도 있노라고 호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주 팔자에 당사 주까지 무료로 봐 줄 테니 부부의 출생한 해와 달과 날과 시를 알려달라는 팬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있었고 장문의 설교를 보내주는 성직자도 있었다.
지금은 불법이라 할 수 없는 음악파일도 내 마음대로 소스를 만들어 슬픈 글에는 슬픈 음악을 바람난 남편을 미행하는 스릴 있는 글에는 나름대로의 영화음악을 첨부하였고 내 마음이 청승맞게 느껴지는 날 신세타령에는 울밑에선 봉선화를 삽입해 틀어놓고 눈물을 흘려 가면서까지 나를 추스리는 방편으로 인터넷을 이용하고있었다. 여러 장르의 음악과 그림까지 여기저기에서 스크랩 해다가 공부 잘하는 모범 학생이 된 듯 정성을 다해서 글을 올리면 하루 몇백의 클릭수가 올라가고 거기에 심리학, 철학, 신학, 의학의 강의가 댓 글 창에 펼쳐진다. 어느 변호사는 법적인 해결책을 메일로 보내 주기도 했고 지금은 손을 씻었지만 자신이 조폭 이었었다며 요청만 하면 힘으로 맛을 보여 줄 수도 있노라고 호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주 팔자에 당사 주까지 무료로 봐 줄 테니 부부의 출생한 해와 달과 날과 시를 알려달라는 팬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있었고 장문의 설교를 보내주는 성직자도 있었다.
어떤 이는 남편이 바람난 여인들끼리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모아 오프라인에서 만나자는 제의도 해왔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서 뭘 어쩌자는 건가. 난 거절했다.
내가 남편을 얼굴 없는 온라인 속에서 수 차례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담한 모습으로 발가벗길 때 달래는 세상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었고, 끝내 나의 모습은 남편 간수 못한 칠칠맞은 여편네였음을 나 스스로 판단하고있을 때 달래는 나를 부럽다고 했다. 그후 인터넷상의 모든 곳을 탈퇴했지만 달래와의 메일만은 주고받았다. 1년 정도 거의 매일 자신의 심정을 담담하게 적어 메일로 보내주던 슬픈 달래를 달래면서 나를 돌아보기 도하고 남편의 실수와 허물만 꼬집고 할퀼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닿기도하고 살아 있음을 감사하며 허물도 사랑으로 감싸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달래로 부터 느닷없이 '이 시대의 마지막 순정파 남자를 만나러 서울 갑니다.' 라는 색 다른 메일을 받았다.
강원도 산골에 산다던 그녀의 서울 나들이는 나를 필요로 했고 설레게 까지 했다. 온라인 상에서 만난 지 3년하고도 6개월 드디어 그녀를 만났다. 검은 얼굴에 고3 아들이 있다는 40대 여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나를 먼저 알아본 것은 달래였다. 그 동안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80% 라고 말하는 달래와는 달리 내가 생각한 달래의 모습은 20% 정도만 비슷했다. 작고 귀여웠으며 도시에서도 흔히 볼수없는 귀티나는 인물이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옥수수 따다 팔아서 아들 운동화를 사주었다는 옥수수 따는 여인이 아니었다. 내가 알아 맞춘 것은 얼굴이 가무잡잡한 것 뿐이었다. 달래가 20년을 잊지 못하고 살았다는 첫사랑, 그 남자도 달래를 한날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왔노라는 고백을 받고 달래는 서울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달래가 말하는 이 시대의 마지막 순정파 남자를 만나러 발걸음도 가볍게 명동으로 향했다. 얼굴이 빨그레 사춘기 여학생처럼 들떠 있는 듯 달래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달래의 기분은 물론이고 나는 한술 더 떠서 그 남자도 혼자이길 은근히 바랬다.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나이가 들어서라도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랬다. 내가 꼭 중신애비가 된듯 착각에 빠진것 같기도하고 달래가 좋아하니 나는 덩달아 좋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옛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던 중 그 순정파 남자는 가방 속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달래야! 황토 침대 싸게 해서 하나 구입해라."
달래와 나는 깜짝 놀랬다. 20년을 간직해온 그리운 만남의 기대가 산산조각 깨어지는 순간, 달래의 표정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급히 말을 가로챘다.
"얼마예요?"
"400만원 밖에 안 합니다. 1000만원 넘는 건데 달래 건강을 생각해서 특별히 빼돌려 놓았거든요. 어릴 때 달래가 워낙 약했거든요."
도대체 뭘 특별히 빼돌려 놓았다는 것일까? 결코 싼 물건도 아닐 뿐더러 첫사랑의 환상을 예의상 으로라도 느낄수있도록 시간 이라도 조금 늘려줘야 하는거 아닐런지. 현기증 동반한 착잡한 침묵의 시간이 얼마정도 흘렀을까….
"달래야 기회가 좋으니 놓치지 마라! 사모님도 어떻게… 하나, 결심 하셨습니까?"
"……."
(결심은 무슨… 안 사요.) 속으로 대답했다.
달래의 마음을 달래줄 방법을 찾아야 할텐데 혼자서는 묘안이 안 떠오른다.
아! 나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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