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7일 월요일

미제 돋보기

얼마 전부터 책보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이 침침하고 불편했다. 
친구 얼굴도 볼 겸 시력 검사도 할 겸 친구가 하는 안과에 갔다. 그곳에 가니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눈 아픈 사람들 인양 많이도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검사를 하니 오른쪽0.7 왼쪽 0.8 시력은 좋다고 했다. 책을 볼 때 침침한 것은 그저 노안이 오는 증거라고 한다. 질병이 아니라는 말에 눈이 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와 차 한잔을 나누며 서로의 건강한 삶을 염려도 하면서 잠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웃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안경 쓴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안경을 쓴 사람은 왠지 부자이고 지식인이고 공부도 잘하고 유명인 같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안경 쓴 사람이 부러웠다. 주로 책에 나오는 시인이나 방정환 선생님, 이승만 박사 등 책이나 신문에 비춰진 유명한 사람들은 꼭 안경을 쓴 모습이었다. 그래서 유년기에도 청소년 시기에도 나의 꿈은 안경 쓴 시인이 되고싶었다. 
그렇게 안경 쓴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같은 반이 되어 기뻐하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안경을 쓰고 학교에 온 것이다. 선생님 중에도 안경 쓴 분이 없는데 유독 그 친구가 안경을 쓴 것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부럽든지 나도 한번 안경을 써보고 싶었다. 새 친구 새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서 마음도 부풀어 있던 나는 누구보다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안경만 쓴다면 내가 그 친구보다도 더 멋있고 예쁠 것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에게 눈이 잘 보이지를 않는다고 안경을 하나 사 달라고 졸랐다. 오빠의 유도복을 꿰매고 계시던 엄마는 바늘을 내게 주시며 야단만 치셨다. 

"이누무 기지배가 잘 걸어 다니면 됐지, 앤경잽이가 뭐가 좋다고 안경 타령이야! 나중에 시집도 못 가려고, 바늘에 실이나 껴라!"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아버지의 돋보기를 슬쩍 가방에 넣었다. 아버지의 안경이라도 쓰고 폼을 잡고 싶었다. 골목을 빠져 나와 집이 보이지 않는 신작로까지 나와서 가방에 넣어 둔 안경을 꺼내어 썼다. 누런 뿔테가 약간 할아버지 스타일이긴 했지만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테두리 굵기가 얼마나 굵던지 내 얼굴은 너무 작게 느껴졌다. 특히 납작한 코는 누렇고 굵은 테두리를 걸쳐놓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귀에다 걸고 떨어지지 않게 한 손으로 잡고서 걸었다.
저만치 또래 학생이라도 오면 안경 쓴 모습을 자랑하고 싶어서 떨어지지 않게 얼굴을 바짝 들고 걸었다. 그런데 돋보기 안경이라 그런지 앞이 뿌옇고 잘 보이질 않았다. 땅이 쑤~욱 들어간 곳이라 생각하고 딛으면 뿔뚝 올라와 있고, 뿔뚝 올라온 줄 알고 딛으면 쿵! 하고 발이 빠지는 구덩이인 것이었다. 돌멩이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뻘겋게 까지고 피도 나고 쓰라리고 아팠지만 그래도 안경 쓴 멋진 모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꾹 참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넘어진 것은 천만 다행이고 행운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 뒤로는 사람이 없으면 얼른 벗어 손에 들고 걸었고, 사람이 오면 다시 쓰고 폼을 잡으며 걸었다.
학교에 가서도 역시 안경을 쓰고 수업을 했다. 아이들이 한번 써보자고 할 때에도 안 된다며 짝꿍에게만 한번 써 보라고 인심을 썼다. 그때 그 친구 내 아버지 돋보기를 써보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너무 잘 보인다. 나도 눈이 나쁜가봐! 집에 가서 나도 엄마한테 안경 사 달래야지! 이거 얼마 줬니?" 하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술 더 떠서 말했다. 

"몰라, 엄마가 사 오셨어. 좀 비쌀 거야, 미제거든?" 이렇게 허풍까지 쳤다.
그 친구는 지금 안과 전문의가 되어서 오늘 내게 말한다. 

"어이 노친네! 그때 그 미제 돋보기 지금 쓰면 "딱" 인데…, 가능하다면 똑같은 미제 돋보기를 구해보시지! 하하하!!"

"그런데 참 나는 지금도 궁금한데... 그때 그 안경 썼을 때 너 정말 잘 보였었니?"

"보이긴,,,? 너나 나나 왜 그런 거짓말을 했었는지 몰라. 그때는 왠지 안경을 쓰면 공부도 잘하고 부자 집 공주 님 같이 보인다는 사춘기 때 착각이었겠지."

"너 생각나니? 가수 되었던 박 ㅎ ㄱ 알 없는 안경 쓰고 멋 부리고 다니던 그 애 말이야. 결국 가수 되고 t.v 안에서 꽤나 유명하게 노래하고 들 뛰고 춤추고 하더니 결국에는 네델란드라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억만장자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신문기사가 나오더니 사라졌잖아."

시력은 아직 괜찮다는 말과 그래도 이제는 노안이 시작 되었으므로 어릴 때 소원하던 소원을 풀어주겠노라고 건네주는 안경 처방전을 받아들고 친구의 장난기 담긴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그 옛날 안경이 쓰고싶어서 안달했던 날을 추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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