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25일 금요일

별명


무릎인대가 늘어나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있던 나는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요즈음 다리도 아프고 콧속도 부르 터서 병원에 치료를 받는다고, 신세타령 하기에 마냥 좋은 친구다. 대학동창인 그 친구랑은 마음이 잘 맞아 바쁘더라도 한달 에 한번쯤은 꼭 보던 사이였는데 몇 년 사이 연락이 뜸했었다.

"어디가 아파? 나도 요즘 물리치료를 받는데…."

친구도 무릎하고 코가 아프단다.

"어쩜 우리 둘이 다 동시에 다리를 다쳤을까? 재미있다. 하하하!"

친구는 아픈 것이 뭐가 좋다고 어린아이처럼 깔깔대며 웃어댄다.
우리는 전화 통화를 하다가 곧 바로 만났다.
만나자마자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계집애, 계집애' 하며 시끄럽게 수 다를 떨었다.
친구는 대학 다닐 때 선배에게 코가 꿰어(?)졸업도 않은 채 결혼을 했다.
학교 내에서도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던 그들이 결혼 하려고 했을 때 우리친구들은 모두 반대했었다. 
이유인즉 그 선배가 아끼는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항상 소유물처럼 친구를 옆에 두려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게 사귀는 티를 많이 내는 것 또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었다.
한편 극진한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친구를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었다.
아무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학업마저 포기한 채 기어이 그 선배와 결혼을 했다.
줄줄이 4남매를 낳고 얼마 전에 손자까지 보았다.

"그래 네 남편은 여전히 너에게 극진히 잘해주고?"

"말 도마라."

지금도 친구 남편은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이야기하거나 조금이라도 상냥하게 대하면 난리가 난다 고한다.

"아니, 결혼한지가 벌써 몇십 년인데...손자까지 있는 마당에......."

얼마 전 집 앞에 나갔는데 새로 이사온 이웃 남자가 재활용품 수거 장소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기에 대답해 주었단다. 그리고 베란다 쪽을 쳐다보았더니 남편이 자기를 쳐다보며 손을 흔들어 주더란 다. 그런데 그 순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손에 들고있던 바가지는 퉁겨 나가고 담겨있던 콩나물은 흩어지고 무릎도 손바닥도 깨진 것이다. 놀란 이웃 남자가 일으켜주고 콩나물도 주워 주었다. 무릎이 깨져 절룩거리며 들어오는데 남편이 하는 말,

"바가지는 안 깨졌어? 그 남자에게 뭘 잘 보이려다 그 앞에서 넘어져? 넘어지긴!"

여기 저기 깨진 상처보다 남편의 말이 더 아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그 유난스럽던 학창시절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 네 남편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하구나! 미안 하지만 네 남편 별명이 의처증이 였잖어!"

아직도 소녀같이 알콩달콩 사는 친구 앞에서 '의처증' 이라는 단어는 전혀 나쁜 의미가 아니었다. 
아직도 끔찍한 사랑을 과시하며 사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늘, 항상 행복하기를…….


(월간 함께가는 세상 2005년4월호 게재.)

2005년 3월 17일 목요일

게으름때문에

어머니 늘 하시던 말씀 '게을러도 살고 부지런해도 산다' 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그런데 게을러서 물을 안준 것이 아니고 사노라니 생활에 어려움이 많아 그 동안 신경을 못썼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지 바빴던 날들을 보상받는 듯한 큰 기쁨이다.
게으름 때문에 이렇게도 큰 기쁨이 찾아오다니 너무 행복한 오늘이다 
유난히도 흙장난을 좋아하는 탓에 이리 저리 옮기고 물주고 그래서 화초들은 뿌리가 녹아서 죽고 그러면 또 흙장난이 시작되고, 그러나 두어 달 흙장난을 못했다. 
무심히 지나쳤던 화초에 오랜만에 물을 주고 난 줄기가 검게 말라버린 잎을 잘라 주기로 했다. 
순간 깜짝 놀랬다. 
하마터면 실수로 이 기쁨을 놓칠 뻔했다. 
거므스레 올라온 난 꽃줄기를 모르고 잘라 버릴 뻔했다.
그것도 두 줄기를....
난 화분에 레이스 장식을 해주었다. 
꽃대가 없는 화분들에게도
보너스로... 
며칠이 지나고 이렇게 단아한 꽃이 피었다.


* 어록
착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난초가 있는 방에 앉아 있는 것처럼 향기롭다.
공자가어 (孔子家語) 


보통걸음 걸이로 중에서.

2005년 3월 7일 월요일

미제 돋보기

얼마 전부터 책보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이 침침하고 불편했다. 
친구 얼굴도 볼 겸 시력 검사도 할 겸 친구가 하는 안과에 갔다. 그곳에 가니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눈 아픈 사람들 인양 많이도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검사를 하니 오른쪽0.7 왼쪽 0.8 시력은 좋다고 했다. 책을 볼 때 침침한 것은 그저 노안이 오는 증거라고 한다. 질병이 아니라는 말에 눈이 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와 차 한잔을 나누며 서로의 건강한 삶을 염려도 하면서 잠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웃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안경 쓴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안경을 쓴 사람은 왠지 부자이고 지식인이고 공부도 잘하고 유명인 같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안경 쓴 사람이 부러웠다. 주로 책에 나오는 시인이나 방정환 선생님, 이승만 박사 등 책이나 신문에 비춰진 유명한 사람들은 꼭 안경을 쓴 모습이었다. 그래서 유년기에도 청소년 시기에도 나의 꿈은 안경 쓴 시인이 되고싶었다. 
그렇게 안경 쓴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같은 반이 되어 기뻐하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안경을 쓰고 학교에 온 것이다. 선생님 중에도 안경 쓴 분이 없는데 유독 그 친구가 안경을 쓴 것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부럽든지 나도 한번 안경을 써보고 싶었다. 새 친구 새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서 마음도 부풀어 있던 나는 누구보다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안경만 쓴다면 내가 그 친구보다도 더 멋있고 예쁠 것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에게 눈이 잘 보이지를 않는다고 안경을 하나 사 달라고 졸랐다. 오빠의 유도복을 꿰매고 계시던 엄마는 바늘을 내게 주시며 야단만 치셨다. 

"이누무 기지배가 잘 걸어 다니면 됐지, 앤경잽이가 뭐가 좋다고 안경 타령이야! 나중에 시집도 못 가려고, 바늘에 실이나 껴라!"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아버지의 돋보기를 슬쩍 가방에 넣었다. 아버지의 안경이라도 쓰고 폼을 잡고 싶었다. 골목을 빠져 나와 집이 보이지 않는 신작로까지 나와서 가방에 넣어 둔 안경을 꺼내어 썼다. 누런 뿔테가 약간 할아버지 스타일이긴 했지만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테두리 굵기가 얼마나 굵던지 내 얼굴은 너무 작게 느껴졌다. 특히 납작한 코는 누렇고 굵은 테두리를 걸쳐놓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귀에다 걸고 떨어지지 않게 한 손으로 잡고서 걸었다.
저만치 또래 학생이라도 오면 안경 쓴 모습을 자랑하고 싶어서 떨어지지 않게 얼굴을 바짝 들고 걸었다. 그런데 돋보기 안경이라 그런지 앞이 뿌옇고 잘 보이질 않았다. 땅이 쑤~욱 들어간 곳이라 생각하고 딛으면 뿔뚝 올라와 있고, 뿔뚝 올라온 줄 알고 딛으면 쿵! 하고 발이 빠지는 구덩이인 것이었다. 돌멩이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뻘겋게 까지고 피도 나고 쓰라리고 아팠지만 그래도 안경 쓴 멋진 모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꾹 참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넘어진 것은 천만 다행이고 행운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 뒤로는 사람이 없으면 얼른 벗어 손에 들고 걸었고, 사람이 오면 다시 쓰고 폼을 잡으며 걸었다.
학교에 가서도 역시 안경을 쓰고 수업을 했다. 아이들이 한번 써보자고 할 때에도 안 된다며 짝꿍에게만 한번 써 보라고 인심을 썼다. 그때 그 친구 내 아버지 돋보기를 써보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너무 잘 보인다. 나도 눈이 나쁜가봐! 집에 가서 나도 엄마한테 안경 사 달래야지! 이거 얼마 줬니?" 하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술 더 떠서 말했다. 

"몰라, 엄마가 사 오셨어. 좀 비쌀 거야, 미제거든?" 이렇게 허풍까지 쳤다.
그 친구는 지금 안과 전문의가 되어서 오늘 내게 말한다. 

"어이 노친네! 그때 그 미제 돋보기 지금 쓰면 "딱" 인데…, 가능하다면 똑같은 미제 돋보기를 구해보시지! 하하하!!"

"그런데 참 나는 지금도 궁금한데... 그때 그 안경 썼을 때 너 정말 잘 보였었니?"

"보이긴,,,? 너나 나나 왜 그런 거짓말을 했었는지 몰라. 그때는 왠지 안경을 쓰면 공부도 잘하고 부자 집 공주 님 같이 보인다는 사춘기 때 착각이었겠지."

"너 생각나니? 가수 되었던 박 ㅎ ㄱ 알 없는 안경 쓰고 멋 부리고 다니던 그 애 말이야. 결국 가수 되고 t.v 안에서 꽤나 유명하게 노래하고 들 뛰고 춤추고 하더니 결국에는 네델란드라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억만장자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신문기사가 나오더니 사라졌잖아."

시력은 아직 괜찮다는 말과 그래도 이제는 노안이 시작 되었으므로 어릴 때 소원하던 소원을 풀어주겠노라고 건네주는 안경 처방전을 받아들고 친구의 장난기 담긴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그 옛날 안경이 쓰고싶어서 안달했던 날을 추억해 본다.




2005년 2월 28일 월요일

바보 같은 남자

'똑똑!' 달래 왔어요.
언니 힘내세요. 언니는 힘든 글을 쓰셨는데 달래는 언니의 글을 보면서 아픔까지도 샘이 나고 때로는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해요.
언니의 글이 없는 날은 이곳을 하루종일 들락거리게 된답니다.'

몇 해전 어느 공개일기장에 일기를 쓸 때였다. 나의 이름은 보리 그녀의 이름은 달래 둘 다 촌스럽지만 정감 있는 이름이었다. 남편의 외도로 터져 나갈 것 같은 속내를 남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일기는 부끄럽게도 하루도 빠짐없이 톱 자리에 올라와 있었고 댓 글은 원 글의 몇 배씩 달렸다. 학교 다닐 때 성적이 그러했다면 아마도 하버드대학에서 장학생으로 보 쌈해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지금은 불법이라 할 수 없는 음악파일도 내 마음대로 소스를 만들어 슬픈 글에는 슬픈 음악을 바람난 남편을 미행하는 스릴 있는 글에는 나름대로의 영화음악을 첨부하였고 내 마음이 청승맞게 느껴지는 날 신세타령에는 울밑에선 봉선화를 삽입해 틀어놓고 눈물을 흘려 가면서까지 나를 추스리는 방편으로 인터넷을 이용하고있었다. 여러 장르의 음악과 그림까지 여기저기에서 스크랩 해다가 공부 잘하는 모범 학생이 된 듯 정성을 다해서 글을 올리면 하루 몇백의 클릭수가 올라가고 거기에 심리학, 철학, 신학, 의학의 강의가 댓 글 창에 펼쳐진다. 어느 변호사는 법적인 해결책을 메일로 보내 주기도 했고 지금은 손을 씻었지만 자신이 조폭 이었었다며 요청만 하면 힘으로 맛을 보여 줄 수도 있노라고 호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주 팔자에 당사 주까지 무료로 봐 줄 테니 부부의 출생한 해와 달과 날과 시를 알려달라는 팬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있었고 장문의 설교를 보내주는 성직자도 있었다.



어떤 이는 남편이 바람난 여인들끼리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모아 오프라인에서 만나자는 제의도 해왔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서 뭘 어쩌자는 건가. 난 거절했다.
내가 남편을 얼굴 없는 온라인 속에서 수 차례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담한 모습으로 발가벗길 때 달래는 세상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었고, 끝내 나의 모습은 남편 간수 못한 칠칠맞은 여편네였음을 나 스스로 판단하고있을 때 달래는 나를 부럽다고 했다. 그후 인터넷상의 모든 곳을 탈퇴했지만  달래와의 메일만은 주고받았다. 1년 정도 거의 매일 자신의 심정을 담담하게 적어 메일로 보내주던 슬픈 달래를 달래면서 나를 돌아보기 도하고 남편의 실수와 허물만 꼬집고 할퀼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닿기도하고 살아 있음을  감사하며 허물도 사랑으로 감싸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달래로 부터 느닷없이 '이 시대의 마지막 순정파 남자를 만나러 서울 갑니다.' 라는 색 다른 메일을 받았다.

강원도 산골에 산다던 그녀의 서울 나들이는 나를 필요로 했고 설레게 까지 했다. 온라인 상에서 만난 지 3년하고도 6개월 드디어 그녀를 만났다. 검은 얼굴에 고3 아들이 있다는 40대 여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나를 먼저 알아본 것은 달래였다. 그 동안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80% 라고 말하는 달래와는 달리 내가 생각한 달래의 모습은 20% 정도만 비슷했다. 작고 귀여웠으며 도시에서도 흔히 볼수없는 귀티나는 인물이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옥수수 따다 팔아서 아들 운동화를 사주었다는 옥수수 따는 여인이 아니었다. 내가 알아 맞춘 것은 얼굴이 가무잡잡한 것 뿐이었다. 달래가 20년을 잊지 못하고 살았다는 첫사랑, 그 남자도 달래를 한날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왔노라는 고백을 받고 달래는 서울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달래가 말하는 이 시대의 마지막 순정파 남자를 만나러 발걸음도 가볍게 명동으로 향했다. 얼굴이 빨그레 사춘기 여학생처럼 들떠 있는 듯 달래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달래의 기분은 물론이고 나는 한술 더 떠서 그 남자도 혼자이길 은근히 바랬다.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나이가 들어서라도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랬다. 내가 꼭 중신애비가 된듯 착각에 빠진것 같기도하고 달래가 좋아하니 나는 덩달아 좋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옛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던 중 그 순정파 남자는 가방 속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달래야! 황토 침대 싸게 해서 하나 구입해라."

달래와 나는 깜짝 놀랬다. 20년을 간직해온 그리운 만남의 기대가 산산조각 깨어지는 순간, 달래의 표정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급히 말을 가로챘다.

"얼마예요?"

"400만원 밖에 안 합니다. 1000만원 넘는 건데 달래 건강을 생각해서 특별히 빼돌려 놓았거든요. 어릴 때 달래가 워낙 약했거든요."

도대체 뭘 특별히 빼돌려 놓았다는 것일까? 결코 싼 물건도 아닐 뿐더러 첫사랑의 환상을 예의상 으로라도 느낄수있도록 시간 이라도 조금 늘려줘야 하는거 아닐런지. 현기증 동반한 착잡한 침묵의 시간이 얼마정도 흘렀을까….

"달래야 기회가 좋으니 놓치지 마라! 사모님도 어떻게… 하나, 결심 하셨습니까?"
"……."

(결심은 무슨…  안 사요.) 속으로 대답했다.
달래의 마음을 달래줄 방법을 찾아야 할텐데 혼자서는 묘안이 안 떠오른다.
아! 나쁜 남자.. 



2005년 2월 10일 목요일

그림 같은 꽃


어둠이 깔리기 전 저수지 근처 길가 화단에 하루종일 비바람 맞고 덩그런히 피어있는 장미의 모습은 중후한 중년의 여인상을 느끼게 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들 한다. 사람의 내면도 외면의 아름다움도 꽃에 비유한다.
그래서 일까? 꽃이 피고 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일생을 그대로 비유하고 있는 것 처럼 보여진다.  
아무리 화려한 꽃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들꽃도 그렇게 피었다가 그렇게 가는 것.
온실에서 곱게 피어 고운 사랑 받은 꽃이나 이름없이 보는 이도 없이 들판에 핀 꽃이나 우리 모두의 끝은 그곳인 것을….
어찌 보면 측은하게 까지 보이는 비에 흠뻑 젖은 장미꽃을 사진으로 남기기는 하였으나 아무리 보아도 물감으로 그려진 것 같은 모양이다. 빨간빛도 분홍빛도, 그렇다고 노랑 빛도 아닌 물감 뒤섞인 듯한 야성의 매력을 주는 장미를 만나게되어 한동안 기쁨 안에 서 있었다.
꽃잎이 떨어질 듯 말 듯한 노화된 장미꽃에서 순간 나의 모습을 본다.

화성 천천리 저수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