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말처럼 나 또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진을 찍으려고 잠시 쪼그리고 앉아있는데 어린이들의 엄마인 듯 젊은 여인3명과 유치 부 어린이 댓 명이 이야기를 나누며 서서히 지나간다. 그들은 주일학교에서 나누어 준 듯한 작은 음료수병과 과자를 각자 손에 들고 있었다. 여인들은 그들대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대로 시끄럽게 말한다.
"여보 한잔해!"
"그래 한잔하자고, 건배!"
어린이들은 음료수병을 부딪치며 몇 번의 건배를 외친다. 그때마다 무엇을 '위하여' 건배할까? 하며 서로 의논까지 한다.
"불타는 이 밤을 위하여~~"
'러브 샷'을 하며 외칠 때는 웃고 넘기기에는 말도 표정도 좀 부담스러운 행동이다.
시대가 시대니 만큼 아이들의 놀이문화도 달라지고 말하는 수준도 우리 때와 완연하게 다르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보여준 오늘의 놀이를 보면서 웃으며 지나쳐 오기는 했지만 너무 어른스러워서 당혹스러웠다.
사람은 4세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이후 살아가는 동안의 일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저 어린이들처럼 취학 전에는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소꿉놀이 밖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지만 그래도 가끔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어른이 된 지금도 어느 계기가 있을 때마다 기억해낼 때가 있다. 맹랑했던 일들이 기억날 때면 빙긋이 웃는 경우가 있다. 저들도 오늘의 일을 어른이 된 후에 기억한다면 얼마나 많이 웃을까?
한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 어른이 되기까지 가장 가까이 에서 사랑으로 보살피는 이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머니 일 것이다.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어 주시고 해산의 고통 겪으며 낳아주시고 갖은 수고로 키워주신다. 그리고 어머니와 더불어 생활 속에서 생활을 배우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세상살이를 익히며 자란다. 그러므로 어른들의 사소한 말일지라도 아이들은 금방 따라하고 배울 수 있다. 아무런 뜻도 모르면서 어른들의 흉내를 내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 하다. 그러나 엄마도 한잔하자며 음료수병을 들이대는 아들을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뜨거운 정열의 밤을 위하여"하며 함께 외쳐주는 젊은 엄마의 사랑방식이 오늘 나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이지만 가능하다면 어린이들은 어린이다운 말을 쓰도록 어른들의 조심스러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노파심일까?
☆ 월간-당신이 축복입니다.
2007년8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