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19일 월요일

목숨건 모험

공원 길을 산책하는데 어찌나 버섯이 많은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잠시 흥분한 상태로 정신없이 버섯을 찍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에 달린 카메라를 들이대고 종류가 다르게 생긴 것은 골고루 찾아서 찍었다. 어찌나 버섯이 많던지 버섯 농장인 듯 착각을 할 지경이었다. 그중 한 종류는 예전에 잔디버섯이라고 불렀었는데…. 먹었던 식용버섯같이 생겼다. 들고 있던 신문으로 고깔모자를 접어 그 속에 버섯을 따서 담았다. 소나무 아래 한곳에 모여있는 버섯만 대충 따 가지고 돌아왔다.

깨끗이 씻고 소금에 절였다.
혹시 독버섯은 아닐까?
그렇다면, 독이 조금이라도 빠져나가라고 끓는 물에 데쳤다.
그래도 의심이 나서 꼭 짜서 냉동실에 얼렸다.
먹고 죽더라도 그냥 버리자니 아까웠다.
최면을 걸 듯이 주문을 외듯이 '식용버섯 이기를' 중얼중얼 혼잣말로 기도했다.
다음날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출출해지는 오후에 냉동실에 얼린 버섯을 꺼내어 버섯 튀김을 준비해 가지고 사무실로 향했다. 인터넷에서 배운 대로 멋진 튀김을 만들었다.
대 성공이다.
직원들에게 말을 한 후 먹어 보라고 권했더니 지켜보기만 하고 아무도 안 먹는다.
나 혼자 열심히 먹었다. "맛있다…. 맛있다…. 쩝쩝~" 거리며 먹기는 했으나 향도 너무 진한 것 같고 사실 나도 꺼림직 하긴 했다.
직원들은 빙긋이 웃으며 서로들 눈치만 볼뿐이었다.
그러다가 여직원이 얼른 튀김 두 개를 호일 에 감아 냉장고에 넣는다.

"나중에 먹으려고? 많은데 더 넣지그래?"

"아니 예요, 그게 아니고 무슨 일이 생기면 역학 조사용으로 보관하는 건데요!? 죄송해요."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miss 가 죄송할 게 뭐란 말인가! 식탐 많은 내가 죄인이지. 사실은 나도 쪼끔 꺼림직 하긴 해!"

말한 내가 순간 머쓱해졌다. 결국에는 수고스럽게 만든 버섯 튀김은 버려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몸이 가려운 것도 같고 가려운 곳을 긁다가 모기 물린 자국을 발견하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가뜩이나 근심걱정 많은 요즈음 이상한 걱정을 만들어서 하고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식용버섯과 독버섯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상세하지가않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독이 퍼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거나 장애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날 저녁 9시 뉴스에 독버섯 먹고 일가족3명중 2명 사망이라는 보도가 방송되었다. 내가 먹은 버섯과 비슷한 버섯이 TV화면에 그 로즈 업 되어 비쳐졌다. 뉴스 좀 길게 해주지 후닥닥 지나가서 아쉬움이 남았다. 방송 뉴스 시간마다 채널을 돌려가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가 끝나도록 tv를 보았다. 겁이 덜컥 났다.
이틀이 지났건만 걱정 근심하느라고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지 계속 피곤하고 잠이 쏟아졌다.
퇴근 시간이 되기 전에 사무실을 나와 친정어머니 입원중인 병원으로 갔다.
피곤해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묻는 가족들에게 휴대전화에 저장되어있는 문제의 버섯사진을 보여주며 난 이렇게 말했다.

"나 이 버섯 먹었거든? 독버섯 아닐까? 아마도 독에 걸린 것 같아!"

"모험할 것을 해야지! 직원들은 모두 괜찮아요?"

"응!"

"이틀 지났는데 직원들 모두 괜찮으면 독버섯은 아니었나 봐요. 별일 없으니 다행이예요."

염려를 내려놓으며 돌아서는 아이들 뒷전을 바라보며 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버섯튀김 나 혼자 먹었는걸?"

"이~잉…?"

 
* 송이버섯 목 먹물 버섯 과에 속한 식용 버섯이다.
봄에서 가을에 걸쳐 정원이나 목장 또는 잔디밭 등의 부식 질이 많은 곳에 모여나거나 뭉쳐난다.



2005년 9월 18일 일요일

코스모스 동산에

내가 어렸을 적에는 코스모스 꽃이 피면 가을이라고 했다.
여름날 어쩌다 코스모스 꽃을 한 송이라도 보면 집에 돌아와 자랑삼아 말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삼복더위 속에서도 여기저기 씨 뿌려 가꾼 코스모스 동산을 보면서 가을 아닌 가을 기분을 미리 맛보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를 대변이라도 하는 듯이 계절도 미리 보기를 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외곽 들길을 달리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언덕 배기에 만발한 코스모스 꽃이 시원한 바람과 어우러져 한들거리는 풍경이야말로 눈으로만 바라보기가 아쉬워 입에서 시 낭독하듯이 말이 새어나온다.

`아~ 가을인가!`

아름다운 꽃동산을 그냥 지나치기 섭섭하여 잠시 차를 멈추었다. 삼복더위에 보던 그 꽃의 느낌과는 달랐다. 가을을 마음으로 느끼고 눈으로 확인하고 나름대로 기뻐하고 있을 때 노출된 팔과 다리의 맨살을 간질이며 스쳐 가는 짓궂은 가을바람의 살랑거림은 소싯적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의 그 감정을 되새김하기에 충분했다. 형형색색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곁에는 노랑나비 흰나비의 느릿한 날개 짓도 여유가 있어 보이고 윙윙거리며 꽃 속을 더듬는 벌들의 속삭임과 꽃 속 깊숙이 입맞추는 모습도 질투 나게 정겹다. 구경이라도 하는 듯이 빙빙 돌다 가볍게 꽃잎 끝에 가느다란 다리를 살짝 내려놓지만 꽃잎이라도 찢어질세라 다시 날개 짓하며 다시 공중을 비행하는 고추잠자리의 평화로운 모습도 한 폭의 그림 같은 가을의 선물이다.
코스모스 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릴 적 일이 생각났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음악 시간으로 기억된다.
 
살랑살랑 실바람을 잡아타고서
오색 가을 넘실넘실 넒 날아오네
산에도 들에도 예쁜 꽃으로 수를 놓으며
바다건너 산너머로 가을이 오네
소를 모는 목동들은 노래부르고
코스모스 방실방실 웃으며 맞네
 
선생님께서 쳐주시는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한 소절씩 따라 부른 뒤에 다 같이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울컥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노래는 물론 부를 수 없었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신 선생님이 내 곁으로 오시면서 교실 안은 술렁거렸다. `왜 울어! 어디 아프니?` 머리를 만져보시는 선생님의 근심 어린 염려 앞에 딱히 뭐라 이유를 댈 수 없었다.
`열은 없는데 체했나?`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었고 순간에 배 아픈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한쪽 손은 배를 움켜쥐고 한쪽 다리는 약간 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오만상을 찌그린 채 짝꿍의 부축을 받으며 양호실로 보내졌다.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연극을 하게 되었다. 양호 선생님께서 청진기를 이리저리 옮겨 진찰하시며, `체한 것 같지는 않은데, 배가 아프니? 화장실 안 가도 되니? `감기 몸살인가? 어디 좀 두고 보자.`
 
고개를 몇 번씩 갸우뚱하실 때마다 연극이 들통날까 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선생님께서 누런 알약을 한 움큼 주실 때는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먹어야 했고 검은 가죽침대 위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 시간을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어야만했다. 쉬는 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도 양호실에 오시어 걱정스럽게 쳐다보시며 말씀하셨다.
 
`얼굴이 창백하구나…. 좀 괜찮니?`
 
그때 나의 얼굴이 창백했던 것은 멀쩡한 몸에 한 움큼의 알약을 먹은 것이 불안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의심 많고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나로서는 약을 목으로 넘긴 후부터 진짜 아프기 시작했다. 수돗가로 달려가 쓰디쓴 약물과 뱃속의 있는 많은 것을 토해낸 후에야 양호실에서 잠이 들었고 급기야는 조퇴를 하고야 말았다. 동요를 부르다가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이 목이 메이던 그 어린 날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머리카락 희끗희끗 반백의 모습으로 변해있는 지금, 코스모스 꽃동산에 서서 그 어린 날을 추억하며 그래도 감성만은 그대로 내 안에 살아남아 있음을 스스로 자신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2005년 9월 16일 금요일

며느리 밑씻개



가칠가칠한 가시가 송송 돋아난 이 풀은 옛 선조들의 장난기를 볼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면 일안하고 화장실만 드나든다고 가시가 난 이 풀의 줄기를 휴지 대신 주곤 했다죠.

어머니는 늘 당당하시고 웃음소리가 크시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큰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집안에 활기가 넘쳐나게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골 풍경들,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이야기해 주신다. 
평소 조용한 나는 그런 어머니를 닮고 싶지만 그러나 천성이 조용한지라 늘 어머니는 말씀을 하시고 나는 듣는다. 
오늘도 그랬다. 어머니는 방문을 여시고 음식 만드는 것을 보시면서 "어멈아! 좀 쉬었다 하라고 하신다.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가서 눕는다. 
어머니는 방안에 앉으셨고 나는 방 밖에서 방 문지방을 가운데에 놓고 어머니 무릎을 베고서 누웠다. 이렇게 살 가운 며느리가 좋다고 아버님 살아생전에 아버님께 듣던 칭찬을 어머니가 하신다.
시골 이웃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분명 입도 조금 헤, 하고 벌어진 듯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나 졸음이 쏟아져 오는지 눈을 떴다 감았다 하고 있는데 개심 치레한 눈을 보셨는지 졸리느냐고 물으신다.

"아니에요. 음식 냄새 때문에 눈이 좀 피곤해요. 눈감고 들을 테니 어머니 계속 이야기하세요."

어머니가 크게 웃으면 나도 따라 웃고 이야기하시면 고개도 끄덕여 가면서, 네, 그래요?, 하며 대답은 모두 하면서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있는 상태였으리라.
그야말로 비몽사몽이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 아랫집 영란이네 집에 불이 나서 집이 모두 타고, 소 외양간도 타들어 가기에 처음 그 불길을 보신 어머니께서 "불이야! 불이야!" 하고 소리를 쳤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재연을 하셨다.
때맞추어 밖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무인 경비업체에서 지나갔든지 아니면 응급환자 수송 차량이 지나갔는가 보다.
비몽사몽 중에 '불이야!' 하는 소리가 얼마나 실감나게 들렸던지, 그 순간 놀라서 "어디냐고 소리치며 맨발로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머니도 놀라서 베개를 끌어안고 뛰어 나오셨다.

"아야! 왜 그러니.!"

"불이야! 했잖아요, 어머니가."
그야말로 흥분 상태다.
"하하하!!! 너 잠들었었구나? 들어가서 한숨 자거라."
재미있으신 지 한참을 웃으시는 어머니 한 말씀하신다.

"너희 아버지 살아 계셨으면 너희와 함께 살았을 건데, 너희랑 사신다고 했었는데."

평소 명랑하시고 털털하신 어머니에게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을 보았다. 
어머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한마디 건네고 싶은데 직접 표현 못하는 말을 이렇게 적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채워 드릴 수는 없지만 도시 생활도 무료하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오세요.
'저희는 늘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5년 8월 25일 목요일

압구정동 거리에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예전부터 고궁이나 서원 혹은 고택에서 보아 오던 나무지만 요즈음은 공원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다. 아침 산책길에 작은 공원을 지나쳐 간다. 그곳에는 단풍나무, 산 사자 나무, 그리고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그 중에 회화나무는 여름내 꽃이 피고, 떨어지고 여름에 흰 눈을 보는 듯하다. 생김새는 잎도, 꽃도 아카시아처럼 생겼지만 꽃술은 작고 잎사귀도 작다. 은은한 우유 빛 탐스러운 꽃송이는 화려하거나 두드러지게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 가득 꽃송이들이 피어나면 풍성하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그렇게 넉넉하던 꽃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느새 염주 알처럼 잘록 잘록한 열매가 가을과 함께 여물어 간다.

본래는 중국이 원산지라지만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한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우리의 나무라 하여도 흠잡을 일은 없을듯하다.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어 놓으면 자손 중에 문인이나 학자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듯 좋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홰나무(회화)가 내 고향 청담동 이층집 뒤란에 있었다.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그 회화나무 아래에서 세 번 통곡하며 우셨다는 이야기를 우리 육 남매가 자랄 때 여러 번 하셨다.
일찍이 할아버지께서 장자의 위치를 지키게 하신다고 어린 장남에게는 공부대신 만석꾼의 농사를 넘겨주셨다고 한다. 너무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일이 힘들고 공부하고 싶을 때면 뒤란 회화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우셨다고 했다.
공부가 한이 되어 두 동생과 두 남매도 학자가 되도록 뒷바라지하시어 아버지의 소망대로 학자로 키우셨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나라에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서 영어공부를 하셨고 미술공부도 하셨다. 그리고 교회에 헌납해준 풍금으로 풍금도 배우셨다.
그러고 보면 요즘 공부의 관심사인 외국어, 미술, 음악 공부를 독학으로 하신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할아버지 댁에 벼 베기 하는 일요일날 아버지에게 상처를 남기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 당시 일가 친척 이웃간에 품앗이로 일을 돌보아야 했지만 주일 날 인지라 아버지는 교회에서 풍금 반주를 하고 계셨다고 한다. 추수하는 시기에 집안의 장손으로서 사내자식이 예수쟁이들을 따라다니며 혀 꼬부라진 말이나 해대고 계집애처럼 풍금이나 두드리고 있다며 부지깽이를 들고 들어와 풍금 치는 손을 후려쳤다고 한다. 얼마나 세게 때렸기에 손가락의 뼈가 으스러졌는지 아버지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마디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툭 튀어 나와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일로 할아버지께서는 작은할아버지에게 너무 서운한 나머지 회화나무 아래에서 아버지를 달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5학년이 되던 해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을 우리 형제들이 모두 보았다.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로 바뀌면서 우리 집은 길이 된다는 말이 있었고 그 집에서 사대문 안으로 이사하던 날 우리 식구는 마지막으로 집 주변 곳곳을 둘러보았다. 등나무가 지붕 되어 더욱 시원하던 뒤란에 깊고 맑은 우물과 하얀 튀밥을 쏱아놓은것처럼 꽃잎 날리던 회화나무 그늘은 아버지의 쉼터였던 것 같다.
그곳을 떠나는 어른들의 아쉬운 눈물을 보면서 무슨 감정에서인지 덩달아 서럽게 큰 소리내며 쫓아서 울던 내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지금은 온데간데없는 이층집 뒤뜰의 회화나무도 맑은 샘물이 작은 분수처럼 솟아 흐르던 우물가도 노란 꽃과 하얀 꽃이 함께 피는 인동 초 덩굴과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돌담도 그리움이 되어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이 있었기에 고향의 정겨움이나 그 옛날의 풍취는 없지만 아파트 숲 속에서나마 고향을 지키고 있는 대물림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남 구청에 볼일이 있어 압구정동 길을 바쁜 걸음으로 걷다가 내 눈에 들어온 가로수나무가 회화나무라는 것을 발견하고 콩 꼬투리 같은 홰나무 열매를 쳐다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유년시절을 추억해 보았다. 예로부터 회화나무 3그루를 집 앞문에 세워두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행복의 나무로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토록 좋은 나무가 방방곡곡에 많이 심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행복나무 라고까지 불리는 그 가로수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소원한다.
추억의 회화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놓은 압구정동에 혹시 문인들의 거리도 있는지 궁금해진다.


☆ tip
  옛 기록을 찾아보니 이 나무를 한자로 쓸 때 괴수(槐樹)라고 하는데 느티나무를 두고 괴(槐)자로 쓰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 한자가 나오는 곳은 실제로 가 보면, 회화나무가 있기도 하고 느티나무가 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높은 관직을 얻은 신하의 별칭이 괴문(槐門)일 때는 회화나무를 말하는 것이고, 괴목(槐木)으로 만들었다는 가구 등에는 느티나무가 많다. 회화나무는 꽃봉오리는 쌀의 모양과 비슷하여 괴미(槐米), 피고 나면 괴화(槐花)라고 하는데 루틴이라는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고혈압, 지혈, 진경, 소종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차로 다려 마시기도 한다. 열매 역시 강장제 등에 쓰이고 괴료라고 부르는 수액은 신경마비증상에 단기간의 치료제로 복용한다고 한다. 예로부터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기념수로 심는 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2005년 7월 10일 일요일

어색한 진리

건널목 앞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었다.
언제인가 정지선 지키기 단속하는 광경을 보면서 정지선에 자동차 바퀴가 조금 닿으니 후진하는 운전자를 본 적이 있다.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의지가 대단해 보였다.
단속 중이던 교통경찰이 곁에서 보고 빙긋이 웃었다.
그곳에서 그 광경을 보던 많은 사람도 웃었다.
벌금 딱지의 위력이었다.
오랜 날이 지나고 다른 날 삼거리 같은 건널목 앞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었다.
움찔움찔 움직이며 앞으로 온 차들은 건널목을 모두 점령했다.
그리곤 노랑 불도 들어오기 전에 붕~ 하고 달린다.
건널목 앞에 서 있던 여러 사람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바쁘면 어제 나오지 왜 이제 나왔어!"

그 말에 여러 사람이 웃었다.
그 말이 맞는 웃음인지 쓴웃음인지 그냥 지나치는 웃음인지 나는 모른다.
오늘 낮에 나와 청년 한 명이 빨강 신호등을 주시하며 건널목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뾰족구두 소리를 똑똑 거리며 멋쟁이 여인이 아무 거침도 없이 느긋하게 길을 건넌다.
어디에서부터 뛰어왔는지 그 뒤로 고등학생 두 명도 뛰어서 건너갔다.
내 옆에 청년이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그도 건너간다.
혼자 서있는 내 모습이 민망하고 머쓱했다.
나의 마음속에서 '건너! 건너!' 하는 큰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잠깐 사이 내 모습이 어찌나 바보 된 기분이 들던지....
참되게 살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옳은 비유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작가 맥스 루케이도의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어색하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