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나무는 예전부터 고궁이나 서원 혹은 고택에서 보아 오던 나무지만 요즈음은 공원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다. 아침 산책길에 작은 공원을 지나쳐 간다. 그곳에는 단풍나무, 산 사자 나무, 그리고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그 중에 회화나무는 여름내 꽃이 피고, 떨어지고 여름에 흰 눈을 보는 듯하다. 생김새는 잎도, 꽃도 아카시아처럼 생겼지만 꽃술은 작고 잎사귀도 작다. 은은한 우유 빛 탐스러운 꽃송이는 화려하거나 두드러지게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 가득 꽃송이들이 피어나면 풍성하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그렇게 넉넉하던 꽃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느새 염주 알처럼 잘록 잘록한 열매가 가을과 함께 여물어 간다.
본래는 중국이 원산지라지만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한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우리의 나무라 하여도 흠잡을 일은 없을듯하다.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어 놓으면 자손 중에 문인이나 학자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듯 좋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홰나무(회화)가 내 고향 청담동 이층집 뒤란에 있었다.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어 놓으면 자손 중에 문인이나 학자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듯 좋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홰나무(회화)가 내 고향 청담동 이층집 뒤란에 있었다.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그 회화나무 아래에서 세 번 통곡하며 우셨다는 이야기를 우리 육 남매가 자랄 때 여러 번 하셨다.
일찍이 할아버지께서 장자의 위치를 지키게 하신다고 어린 장남에게는 공부대신 만석꾼의 농사를 넘겨주셨다고 한다. 너무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일이 힘들고 공부하고 싶을 때면 뒤란 회화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우셨다고 했다.
공부가 한이 되어 두 동생과 두 남매도 학자가 되도록 뒷바라지하시어 아버지의 소망대로 학자로 키우셨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나라에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서 영어공부를 하셨고 미술공부도 하셨다. 그리고 교회에 헌납해준 풍금으로 풍금도 배우셨다.
그러고 보면 요즘 공부의 관심사인 외국어, 미술, 음악 공부를 독학으로 하신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할아버지 댁에 벼 베기 하는 일요일날 아버지에게 상처를 남기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 당시 일가 친척 이웃간에 품앗이로 일을 돌보아야 했지만 주일 날 인지라 아버지는 교회에서 풍금 반주를 하고 계셨다고 한다. 추수하는 시기에 집안의 장손으로서 사내자식이 예수쟁이들을 따라다니며 혀 꼬부라진 말이나 해대고 계집애처럼 풍금이나 두드리고 있다며 부지깽이를 들고 들어와 풍금 치는 손을 후려쳤다고 한다. 얼마나 세게 때렸기에 손가락의 뼈가 으스러졌는지 아버지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마디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툭 튀어 나와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일로 할아버지께서는 작은할아버지에게 너무 서운한 나머지 회화나무 아래에서 아버지를 달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5학년이 되던 해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을 우리 형제들이 모두 보았다.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로 바뀌면서 우리 집은 길이 된다는 말이 있었고 그 집에서 사대문 안으로 이사하던 날 우리 식구는 마지막으로 집 주변 곳곳을 둘러보았다. 등나무가 지붕 되어 더욱 시원하던 뒤란에 깊고 맑은 우물과 하얀 튀밥을 쏱아놓은것처럼 꽃잎 날리던 회화나무 그늘은 아버지의 쉼터였던 것 같다.
그곳을 떠나는 어른들의 아쉬운 눈물을 보면서 무슨 감정에서인지 덩달아 서럽게 큰 소리내며 쫓아서 울던 내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그러고 보면 요즘 공부의 관심사인 외국어, 미술, 음악 공부를 독학으로 하신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할아버지 댁에 벼 베기 하는 일요일날 아버지에게 상처를 남기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 당시 일가 친척 이웃간에 품앗이로 일을 돌보아야 했지만 주일 날 인지라 아버지는 교회에서 풍금 반주를 하고 계셨다고 한다. 추수하는 시기에 집안의 장손으로서 사내자식이 예수쟁이들을 따라다니며 혀 꼬부라진 말이나 해대고 계집애처럼 풍금이나 두드리고 있다며 부지깽이를 들고 들어와 풍금 치는 손을 후려쳤다고 한다. 얼마나 세게 때렸기에 손가락의 뼈가 으스러졌는지 아버지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마디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툭 튀어 나와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일로 할아버지께서는 작은할아버지에게 너무 서운한 나머지 회화나무 아래에서 아버지를 달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5학년이 되던 해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을 우리 형제들이 모두 보았다.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로 바뀌면서 우리 집은 길이 된다는 말이 있었고 그 집에서 사대문 안으로 이사하던 날 우리 식구는 마지막으로 집 주변 곳곳을 둘러보았다. 등나무가 지붕 되어 더욱 시원하던 뒤란에 깊고 맑은 우물과 하얀 튀밥을 쏱아놓은것처럼 꽃잎 날리던 회화나무 그늘은 아버지의 쉼터였던 것 같다.
그곳을 떠나는 어른들의 아쉬운 눈물을 보면서 무슨 감정에서인지 덩달아 서럽게 큰 소리내며 쫓아서 울던 내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지금은 온데간데없는 이층집 뒤뜰의 회화나무도 맑은 샘물이 작은 분수처럼 솟아 흐르던 우물가도 노란 꽃과 하얀 꽃이 함께 피는 인동 초 덩굴과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돌담도 그리움이 되어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이 있었기에 고향의 정겨움이나 그 옛날의 풍취는 없지만 아파트 숲 속에서나마 고향을 지키고 있는 대물림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남 구청에 볼일이 있어 압구정동 길을 바쁜 걸음으로 걷다가 내 눈에 들어온 가로수나무가 회화나무라는 것을 발견하고 콩 꼬투리 같은 홰나무 열매를 쳐다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유년시절을 추억해 보았다. 예로부터 회화나무 3그루를 집 앞문에 세워두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행복의 나무로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토록 좋은 나무가 방방곡곡에 많이 심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행복나무 라고까지 불리는 그 가로수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소원한다.
추억의 회화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놓은 압구정동에 혹시 문인들의 거리도 있는지 궁금해진다.
추억의 회화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놓은 압구정동에 혹시 문인들의 거리도 있는지 궁금해진다.
☆ tip
옛 기록을 찾아보니 이 나무를 한자로 쓸 때 괴수(槐樹)라고 하는데 느티나무를 두고 괴(槐)자로 쓰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 한자가 나오는 곳은 실제로 가 보면, 회화나무가 있기도 하고 느티나무가 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높은 관직을 얻은 신하의 별칭이 괴문(槐門)일 때는 회화나무를 말하는 것이고, 괴목(槐木)으로 만들었다는 가구 등에는 느티나무가 많다. 회화나무는 꽃봉오리는 쌀의 모양과 비슷하여 괴미(槐米), 피고 나면 괴화(槐花)라고 하는데 루틴이라는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고혈압, 지혈, 진경, 소종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차로 다려 마시기도 한다. 열매 역시 강장제 등에 쓰이고 괴료라고 부르는 수액은 신경마비증상에 단기간의 치료제로 복용한다고 한다. 예로부터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기념수로 심는 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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