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25일 목요일

압구정동 거리에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예전부터 고궁이나 서원 혹은 고택에서 보아 오던 나무지만 요즈음은 공원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다. 아침 산책길에 작은 공원을 지나쳐 간다. 그곳에는 단풍나무, 산 사자 나무, 그리고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그 중에 회화나무는 여름내 꽃이 피고, 떨어지고 여름에 흰 눈을 보는 듯하다. 생김새는 잎도, 꽃도 아카시아처럼 생겼지만 꽃술은 작고 잎사귀도 작다. 은은한 우유 빛 탐스러운 꽃송이는 화려하거나 두드러지게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 가득 꽃송이들이 피어나면 풍성하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그렇게 넉넉하던 꽃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느새 염주 알처럼 잘록 잘록한 열매가 가을과 함께 여물어 간다.

본래는 중국이 원산지라지만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한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우리의 나무라 하여도 흠잡을 일은 없을듯하다.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어 놓으면 자손 중에 문인이나 학자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듯 좋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홰나무(회화)가 내 고향 청담동 이층집 뒤란에 있었다.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그 회화나무 아래에서 세 번 통곡하며 우셨다는 이야기를 우리 육 남매가 자랄 때 여러 번 하셨다.
일찍이 할아버지께서 장자의 위치를 지키게 하신다고 어린 장남에게는 공부대신 만석꾼의 농사를 넘겨주셨다고 한다. 너무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일이 힘들고 공부하고 싶을 때면 뒤란 회화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우셨다고 했다.
공부가 한이 되어 두 동생과 두 남매도 학자가 되도록 뒷바라지하시어 아버지의 소망대로 학자로 키우셨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나라에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서 영어공부를 하셨고 미술공부도 하셨다. 그리고 교회에 헌납해준 풍금으로 풍금도 배우셨다.
그러고 보면 요즘 공부의 관심사인 외국어, 미술, 음악 공부를 독학으로 하신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할아버지 댁에 벼 베기 하는 일요일날 아버지에게 상처를 남기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 당시 일가 친척 이웃간에 품앗이로 일을 돌보아야 했지만 주일 날 인지라 아버지는 교회에서 풍금 반주를 하고 계셨다고 한다. 추수하는 시기에 집안의 장손으로서 사내자식이 예수쟁이들을 따라다니며 혀 꼬부라진 말이나 해대고 계집애처럼 풍금이나 두드리고 있다며 부지깽이를 들고 들어와 풍금 치는 손을 후려쳤다고 한다. 얼마나 세게 때렸기에 손가락의 뼈가 으스러졌는지 아버지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마디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툭 튀어 나와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일로 할아버지께서는 작은할아버지에게 너무 서운한 나머지 회화나무 아래에서 아버지를 달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5학년이 되던 해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을 우리 형제들이 모두 보았다.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로 바뀌면서 우리 집은 길이 된다는 말이 있었고 그 집에서 사대문 안으로 이사하던 날 우리 식구는 마지막으로 집 주변 곳곳을 둘러보았다. 등나무가 지붕 되어 더욱 시원하던 뒤란에 깊고 맑은 우물과 하얀 튀밥을 쏱아놓은것처럼 꽃잎 날리던 회화나무 그늘은 아버지의 쉼터였던 것 같다.
그곳을 떠나는 어른들의 아쉬운 눈물을 보면서 무슨 감정에서인지 덩달아 서럽게 큰 소리내며 쫓아서 울던 내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지금은 온데간데없는 이층집 뒤뜰의 회화나무도 맑은 샘물이 작은 분수처럼 솟아 흐르던 우물가도 노란 꽃과 하얀 꽃이 함께 피는 인동 초 덩굴과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돌담도 그리움이 되어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이 있었기에 고향의 정겨움이나 그 옛날의 풍취는 없지만 아파트 숲 속에서나마 고향을 지키고 있는 대물림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남 구청에 볼일이 있어 압구정동 길을 바쁜 걸음으로 걷다가 내 눈에 들어온 가로수나무가 회화나무라는 것을 발견하고 콩 꼬투리 같은 홰나무 열매를 쳐다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유년시절을 추억해 보았다. 예로부터 회화나무 3그루를 집 앞문에 세워두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행복의 나무로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토록 좋은 나무가 방방곡곡에 많이 심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행복나무 라고까지 불리는 그 가로수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소원한다.
추억의 회화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놓은 압구정동에 혹시 문인들의 거리도 있는지 궁금해진다.


☆ tip
  옛 기록을 찾아보니 이 나무를 한자로 쓸 때 괴수(槐樹)라고 하는데 느티나무를 두고 괴(槐)자로 쓰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 한자가 나오는 곳은 실제로 가 보면, 회화나무가 있기도 하고 느티나무가 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높은 관직을 얻은 신하의 별칭이 괴문(槐門)일 때는 회화나무를 말하는 것이고, 괴목(槐木)으로 만들었다는 가구 등에는 느티나무가 많다. 회화나무는 꽃봉오리는 쌀의 모양과 비슷하여 괴미(槐米), 피고 나면 괴화(槐花)라고 하는데 루틴이라는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고혈압, 지혈, 진경, 소종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차로 다려 마시기도 한다. 열매 역시 강장제 등에 쓰이고 괴료라고 부르는 수액은 신경마비증상에 단기간의 치료제로 복용한다고 한다. 예로부터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기념수로 심는 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2005년 7월 10일 일요일

어색한 진리

건널목 앞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었다.
언제인가 정지선 지키기 단속하는 광경을 보면서 정지선에 자동차 바퀴가 조금 닿으니 후진하는 운전자를 본 적이 있다.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의지가 대단해 보였다.
단속 중이던 교통경찰이 곁에서 보고 빙긋이 웃었다.
그곳에서 그 광경을 보던 많은 사람도 웃었다.
벌금 딱지의 위력이었다.
오랜 날이 지나고 다른 날 삼거리 같은 건널목 앞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었다.
움찔움찔 움직이며 앞으로 온 차들은 건널목을 모두 점령했다.
그리곤 노랑 불도 들어오기 전에 붕~ 하고 달린다.
건널목 앞에 서 있던 여러 사람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바쁘면 어제 나오지 왜 이제 나왔어!"

그 말에 여러 사람이 웃었다.
그 말이 맞는 웃음인지 쓴웃음인지 그냥 지나치는 웃음인지 나는 모른다.
오늘 낮에 나와 청년 한 명이 빨강 신호등을 주시하며 건널목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뾰족구두 소리를 똑똑 거리며 멋쟁이 여인이 아무 거침도 없이 느긋하게 길을 건넌다.
어디에서부터 뛰어왔는지 그 뒤로 고등학생 두 명도 뛰어서 건너갔다.
내 옆에 청년이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그도 건너간다.
혼자 서있는 내 모습이 민망하고 머쓱했다.
나의 마음속에서 '건너! 건너!' 하는 큰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잠깐 사이 내 모습이 어찌나 바보 된 기분이 들던지....
참되게 살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옳은 비유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작가 맥스 루케이도의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어색하게 하리라”


2005년 6월 30일 목요일

호상

어느 날 집에서 키우던 정열이라는 까만 강아지가 똥차에 치어 죽었다. 
울고있는 나를 아버지 친구이신 새말(신사동) 아저씨가 보셨다. 딸이 없는 아저씨는 나를 보기만 하면 아버지에게 양딸로 달라고 데려가겠다고 하시며 친딸처럼 예뻐해 주셨다. 난 혹시 아저씨 집에 가게 될까봐 깍쟁이 짓을 하며 강력하게 싫다고 했다.
그런데 울고있는 나에게 귀가 번쩍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아저씨 집에 개가 새끼를 세 마리 낳았는데 젖이 떨어지면 예쁜 강아지를 줄 테니 울지 말라고 손가락까지 걸어 약속해 주셨다. 울음을 뚝 그치니 엄마는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으실 뿐이었다. 아저씨가 가신 후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아저씨네 강아지 새끼 낳은 거 맞아?"

"그래, 암놈은 없고 수놈만 세 마리 낳았다고 새끼도 못 낳는 숫놈들 얼른 길러서 잡아먹는다고 하시더라. 암놈이 아니라서 아마 주실 거다."

며칠 후 하얀 강아지가 우리 집에 왔다. 이름은 아저씨가 부르는 대로 백구라고 불렀다. 배가 고플까봐 엄마 몰래 내 밥을 덜어서 먹이고 밤이면 몰래 방으로 안고 와서 함께 자기도 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엄마아버지는 질색을 하셨지만 가끔 목욕도 시켜주셨다.
나는 정열이의 죽음을 잊어버렸다.
백구와 행복하게 3개월쯤 지났다.
숙제하는 사이에 백구가 사라졌다. 아버지와 아저씨가 한강에 가셨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달려가다 털썩 주저앉았다.
저 멀리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너무 화가나서 울면서 아저씨가 타고 온 삼천리 자전거 앞 뒤 바퀴 바람을 다 빼버렸다.
40년 전에...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93세의 호 상이다.
내 아버지 보다 20년을 더 사셨다.
우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나는 아버지 생각에, 옛날 생각에 눈물이 살짝 비쳤다.
상주인 아저씨 아들이 인사를 하다가 슬쩍 물어본다.

"아버님이 가끔 말하던 자전거 바람 빼 놓은 그 소녀?"

참, 왠 소녀...

까딱 했으면 상가 집에서 울다가 웃을 뻔했다. 말솜씨하며 보톡스를 맞았는지 너무 빵빵한 얼굴이 60 나이에 걸맞지 않게 보이는 그 오라버니를 보니 졸부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대단해보인다. 부의 여유라고나 할까? 순간적으로  그 옛날 양딸로 갈 것을 그랬나? 하는 생각을...ㅋㅋㅋ'

문상객들도 호상이라서 그런지 표정들이 그리 무겁지가않다.
아저씨의 영면을 기도합니다.

2005년 6월 22일 수요일

기분 좋은날



딸의 친구들이 모여 시끌벅적하다.
젊음, 아름답고 싱그럽고 명민한 그젊음에 문득 부러움을느낀다. 

나도 그 시절을 보냈건만…!
거울 속에 비친 까칠해진 내 얼굴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씁쓸하게 입맛을 '쩌~억' 하고 다셔본다. 
마음속에 이상을 가지면 영혼이 늙지 않는다는 어느  광고를 보며 '말도안돼. 나이가들면 몸도 영혼도 늙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나이든다' 는 것에 예민해져 간다.
깔깔 거리며 돌아가는 딸들의 인사를 받고 돌아서는데 이런 말이 들린다.

"사키야! 너랑 엄마랑 함께 밖에 나가면 자매라고 하겠다."

"뭐야! 내가 늙어보여?"

딸이 친구를 향해 항의하는 명쾌함 웃음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빙긋이 웃었다.
빈 말 일수도 있는 그말에 기분이 조금 맑아진다.
언제적 들었던 노래가 내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혼자 온갖 고뇌 다 지고 있는 것처럼 우울해 할때는 언제고 
신나는 유행가가 저절로 튀어 나오다니!
주책맞게 어린아이처럼 딸들의 말 한마디에 힘을 싣다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래,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오늘은 커피 말고 녹차를 마시기로 하고 다구를 비켜두고 대접으로 한사발 마시고 무슨 불로초라도 들이킨 것처럼 "아자, 아자!" 소리내며 벌떡 일어난다.
하지만 무릎에서는 '우두둑 뚝뚝' 뼈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쉬이 지친다.

'이러면 곤란하지. 딸들의 그 대화가 무색 하네!

그 녀석들의 평가는 진심 이었을까?
예의상 한 말이었을까?'
내가 이렇게 순간 기쁨을 느끼는것이 주책일까?
어찌 되었든 고맙다.
예쁜 딸들아!!!

월간 함께가는세상 2005년5월호 게재.

2005년 6월 18일 토요일

갯 메꽃

바다낚시를 자주 가는 친구부부의 안내로 우리부부는 영흥도라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지만 사는 게 뭔지 늘 생각만 간절하던 바다낚시였었는데,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했던가? 드디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즐거움의 도가니였다.
큰고기 작은 고기 횟집에서 보았던 녀석들도 보이고 이름도 모르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잡았다. 낚시의 즐거움도 벅찬데, 보너스의 즐거움도 있다. 골뱅이 조개 게 해삼 성게 등을 잡는 것도 즐거움의 한 부분이었다. 물이 빠지면 왕성한 번식력을 가졌다는 어른 손바닥만한‘바다의 포식자 불가사리까지 놓치지 않고 사진에 담았다.

평소에 회는 별로 즐기지 않지만 그곳에서 먹는 회 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했다. 2박3일 동안 몸에 남아있는 에너지가  마지막까지 바닥 날만큼 낚시를 즐겼다. 바닷가 작은 산등성이에 해풍을 맞으며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화의 아름다움도 일품이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방파제 끝 비스듬한 언덕 돌 틈 사이에 갯 메의 푸르고 싱싱한 줄기들이 뻗어 내려와 자갈을 침상 삼아 기지개 펴듯 누워있는 모양은 그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곳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선 비린내는 향수라 치더라도 생선 썩는 냄새가 참기 힘들게 악취를 냅다 풍기고있었다. 아무리 견디려 했지만 머리가 정신을 놓아버리려 한다.

"요것 봐! 요것 좀 봐봐!! 요따위짓거리 한 것들 뉘란 말이여 어!?
담배꽁초, 고추장 통, 비닐 봉지, 지렁이 상자…  에~구~ 김치 쪼가리도 있고…, 낚시꾼들 짓이여!!! 거럼! 낚시꾼들 짓이여! 쓰글 잡늠들 요따고 행동거지랄 하면 벌받을 기여! 하므….
오~메! 껌 밟았네, 요건 또 오똔 뇬 이 뱉은 겨… .
으~ 이구! 못해 먹것다. 못해 묵것써!"

아침나절 주차장근처 꽃밭 옆, 행 길을 청소하던 아주머니 두 분이 하이 소프라노 목소리로 낚시도구 챙기는 나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하던 말이 머리 속에서 가시질 않아 씁쓸한데 이곳은 도대체 뉘 한 짓이란 말인가! 생선을 이리 많이 상자 채로 버리려면 왜 잡아 왔단 말입니까?
나는 바닷가방파제가 끝나는 그곳에 상자 채로 수북하게 버려져 썩고 있는 그 광경을 보면서 무슨 사정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좋았던 시간 한가운데 옥에 티로 남아있을 기억이다.

그 옆 돌 틈 사이에서 뻗어 내려온 아름다운 갯 메의 줄기는 힘차고 건강하게 뻗어 언덕 아래 자갈밭을 뒤덮고있었으나 식물도 냄새를 맡는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아무리 식물이지만 솔직히 인간의 비 양심을 보인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검은 해녀 복을 갖춰 입은 여인의 모습처럼 그렇게 싱그럽고 건강미가 넘치는 갯 메 덩굴, 다음해에도 그 자리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돌아왔다.
물론 쓰레기 더미는 버린 사람이 양심 껏 자진해서 치워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먼저 하면서 말이다.

아… 즐거움 또 하나,
똥꼬에 새끼손가락 만한 똥을 달고 꼬리 흔들며 따라다니던 식당에서 키우는 덧니 박이 시추 녀석도 웃음을 주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