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일 화요일

아침 발기를 일으킨다 해서 조기라고



길을 지나는데 영광굴비를 싣고 영광에서 오늘 올라왔다며, 영광굴비 오늘만 만원이라고 발걸음을 멈추게한다. 그런데 사실은 매일 그자리에서 장사를 하는것 같은데 오늘도 오늘 하루라고 소리친다. 
시간이 바쁘지 않기에 기웃거렸다.
이쪽은 만원, 요쪽은 2만원, 요놈은 한마리에 만원...
그럼 그렇지.
만원짜리는 황새기 수준이다.
녹음된 목소리로 오늘만 만원이라고 외치는 성우 수준의 바리톤 목소리와는 달리 나이 지긋하신 분이다. 봄볕에 그으른 검은 얼굴과 거친손, 고희는 족히 지났을것 같은 모습이다.
유난히 생선을 좋아하시던 엄마때문에 학교 다닐때 생활기록부에 내 장래희망을 생선장사 라고 썼다가 선생님을 폭소하게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살짝 웃음이났다.
엄마가 좋아하던 엄마방식의 물고기이름, 조기새끼를 엄마 방식으로 조리해서 먹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샀다.

조기는 맛이 좋은 것 만큼이나 영양가도 높다. 
비타민 A, B, C는 물론이고 칼슘, 인, 철 등이 고루 함유되어 있어서인지 심신을 안정시키고 설사를 멈추며 눈을 밝게 해준다. 그뿐이 아니다.
조기는 아침 발기를 일으킨다 해서 조기라고 부를 정도로 영양있고 약효가 있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조기는 구이, 찜, 조림 등 어떤 방식으로 조리해도 맛있어서 좋아하는데 좀 비싸서...
조기의 염건조품 굴비는 영광굴비가 유명하다.

2010년 9월 23일 목요일

콩쥐 팥쥐

할머니가 한강을 건너 사대문안에 사시던 작은아버지 댁에 가시면 언제나 맛있는 과자와 쵸콜릿 사탕을 가지고 오셨다. 그날도 연년생인 언니와 나는 긴 봄날을 울타리 밑에서 소꿉놀이를 했다. 빨간 벽돌을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고 들풀을 짓이겨서 김치를 담그고 흙으로 밥을 지어놓고 할머니가 오시면 드리겠다고 하며 놀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소중하게 접은 베 보자기를 주시며 들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언니를 우물가에 데리고 가서 얼굴과 손을 닦여 손을 잡고 오셨다. 그리고 나는 얼른 가서 혼자 닦으라는 것이었다. 몸이 약했던 언니는 공주 대접을 받으며 그렇게 보호를 받고 자랐고 나는 늘 무수리가 되어 심부름을 해야했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했다. 먹거리가 있을 때면 좋은것은 언니 먼저고 많은 것은 항상 언니 몫 이었다. 연년 생으로 태어나 젖을 미리 빼앗아 먹어서 언니는 약하고 나는 살이 탱글탱글 쪘다며 언제나 나의 차지는 나중이었고 조금이었다.

세수를 하고 돌아오니 베 보자기에 있던 그 큰 사탕을 게눈 감추듯이 다 먹었냐고 야단을 치시는 것 이였다.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데 욕심쟁이가 되어있었다. 꿀돼지가 되어있었다.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빌고있는 두 손위로 후드득 눈물, 콧물이 떨어졌다. 베 보자기에 싸여있던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로 내 작은 그 손등을 톡톡 때리는 할머니가 정말 미웠다.
할머니가 베 보자기에 싸 가지고 온 것은 솜사탕이었다.
얼마나 야속했었던지...

그렇게 언니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은 20년이 넘도록 한결같았다. 우리는 자라 어느 듯 어른이 되었고 언니는 결혼을 했다. 할머니는 언니가 언제 올지 손꼽아 기다리셨고 언니는 용돈도 풍족하게 드렸고 할머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해드렸다.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고 부모님에게보다 더 애틋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언니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았고 할머니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던 10월의 어느 날 83세 할머니는 백도복숭아가 잡숫고 싶다며 올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한동안 오지 않는 언니를 무척 기다리셨다. 기다리는 모습이 나의 마음까지 쓸쓸하게 했다. 나는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대문에 들러 백도 3개 샀다. 할머니는 너무나 맛있게 2개를 잡수셨다. 한 개를 남기시며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내가 널 많이 기다렸어, 복숭아가 먹고싶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할머니는 나를 언니로 착각하고 계셨다.

"애야~ 늬 동생 시집 좀 보내라 시집갈 준비 다해놓았는데 계집애가 핵교만 맨날 왔다갔다하니 복숭아 살 돈도 없지, 늬가 준 돈으로 내가 복숭아 사먹으면 되는데 저 불쌍한 것 시집갈 때 줄라고 돈 통을 막아버렸어."

화초장 안에서 꺼내 보여주는 반짇고리와 열어 볼 수 없도록 수 십 차례 돌려 묶은 검정 고무줄 끈을 풀어 열어본 작은 경대 안에는 차곡차곡 모아놓은 많은 지폐가 있었다. 그 중에는 이미 바뀌어 쓸 수 없는 화폐도 있었고 금붙이들도 여러 종류 있었다. 자식들과 언니가 올 때마다 주고 간 용돈이나 선물들 같다. 내 혼수 준비를 하셨다는 말에 울컥 목이 메었다. 내리사랑의 평범한 진리를 곡해하고 살아온 못난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할머니를 꼭 안아 보았다. 너무 작고 앙상한 몸은 내 품에 쏙 들어왔다. 아마도 마음먹고 안아본 것은 살면서 처음인 것 같았다.

"할머니 똥싸지 않을 거지?. 건강하게 살아야해, 알았지? 내가 할머니한테 이제 잘 할게. 알았지?"

다음날 아침 화장실 변기 머리 동그란 부분에 얼굴을 대고 잠드셨다.

철들자 망령 난다는 옛말이 있다.
효도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말도 있다.
요즘은 있을 때 잘해 라는 말도 있다.
할머니께서 복숭아를 못 드셨으면 나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날 그 작은 몸을 꼭 안아보지 못했다면 내 마음이 얼마나 쓰렸을까.
할머니에게 단 한번 만이라고 공주가 되고싶었던 어린날의 추억이 내게도 있었다.

할머니 올해가 쥐띠 해라는데 올해 나는 사랑 받는 팥쥐 할까, 착한 콩쥐 할까?
할머니 그리워요.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숙주나물


외교관이신 부모님을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살고있는 딸의 후배가 연락도 없이 게릴라식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나간 딸이 데이트가 끝났다며 집에 들어온다는 전화다. 세상이 무섭다 보니 어디를 가는지 도착했는지 귀가 중인지 수시로 연락을 한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귀찮기도 하지만 편리한 점이 많다. 저녁식사는 엄마 좋아하는 트위스터를 샀다며 밥은 짓지 말라고 한다. 영감은 늦는다고 하니 식사 준비는 안 해도 된다. 편하다. 비도 내리고 나가기 싫었는데 잘되었다. 편한 김에 주문도 한다. 콩나물 꼬리가 길지 않은 것으로 아주 조금 들어있는 작은 봉지로 골라서 사들고 오라고 했다. 이럴 때도 편하다. 오늘은 완전히 백수다. 콩나물냉 국을 만들어 시원하게 냉각시켰다가 내일 낮에 먹기만 하면 된다. 아이가 사온 트위스터와 콜라로 백수는 저녁을 먹었다. 배도 부르다.

"엄마 꼬리 짧은 콩나물이 훨씬 비싸던데요? 꼬리 긴 것은 많이 들었는데 2,400원이고 이것은 조금인데 3,900원이래요. 가격이 두 배예요. 냉 콩나물국 만들 때 머리 떼고 꼬리 자르고 다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이건 머리도 없고 통통한 것이 그냥 해도 될 것 같아서 엄마 편리 하라고 비싼 것으로 샀어요."

칭찬 받으려고 말하는 동생 말에 큰애가 꼬리를 단다.

"제발 아는 척 앞서가지 좀 말아라! 원래 콩나물은 길어야 좋은 거야, 키 큰사람 보면 콩나물 많이 먹었느냐고 말하는 거 못 들어 봤어? 그 말은 키큰 콩나물이 좋다는 의미라고."

선물로 받아온 인도네시아 전통그림이 새겨진 금빛 찬란한 bookmark가 아주 예쁘다. '어머니 성경책에 끼우세요.'라고 곱게 적은 메모카드를 읽고 만지고 콩나물은 신경도 안 썼다. 배가 부르니 아무 것도 하기 싫었지만 딸아이 말을 들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데 콩나물 냉국도 만들어야 먹지. 비싼 콩나물은 더 맛있나 어디 만들어 보자고...."

'키 크고 싱겁다는 말도 좋은 의미야?"
칭찬 없는 언니 말에 까칠한 반응을 보이는 조짐이다.
중재를 해야겠기에 한마디 거든다는 말이 작은 아이 편에서 이치에 맞지도 않은 말을 했다.
"원래 콩나물은 키 순서대로 값이 다른 거야. 덜 자란 것이 더 비쌀걸? 영계잖아."내 말에 큰아이가 발끈한다.

"엄마도 제발... 콩나물에 영계가 뭐여요?"

콩나물을 다듬으려고 쟁반에 쏟아놓고 트위스터 먹은 것이 소화가 다 될 정도로 웃고야 말았다. 머리도 없고 통통하고 키 작은 콩나물의 실체는 숙주나물이었다.
새댁이었을 때가 생각난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나는 갖추어진 제사음식을 못보고 살았다. 거기에 오랜 외국에서의 직장생활로 음식은 물론이고 신부로서는 점수를 받을 수 없는 너무 부족한 상태로 사랑 하나만 믿고 결혼했다. 시집가서 처음 제사 음식을 준비 할 때다. 부엌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있는데 손위 형님은 너무 분주했다. 숙주나물을 무치란다. 한 번도 안 해 본 음식이다. 고춧가루 통을 열어놓고 몇 숟가락 넣으면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동서는 친정에서 숙주나물도 안먹어봤어?"

먹어 본적이 있는지 없는지도 기억이 없었기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 무안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평소에 가끔 먹어보기는 했지만 콩나물과 숙주를 구별 못한 딸아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훗날 오늘을 기억하고 웃을 것이다.
살림살이 아무 것도 가르치지 못하고 시집을 보낸것을 못내 안타까워하시며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밑반찬을 해서 나르시던 내 엄마를 생각한다. 딸은 엄마 삶을 많이 닮는다는데 나 역시 엄마로서 갈 길이 멀다.

2010년 1월 15일 금요일

개죽음


찻길 건너던 강아지가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마음이 별로 안 좋다.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주인이 안 나타나는 것을 보니 집을 잃었는지 유기 견인지 알길이없다.

"새해 벽두부터 재수 더럽게..."

사고를 낸 운전자는 인상을쓰고 신경질을 낸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어찌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잘, 잘못을 따지기전에 안전운행 방어운전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침까지 탁하고 밷는 모습이 보기에 안좋다.
그것도 부족한지 주위를 훓어보더니 목숨이 붙어있는 녀석을  발로 두어번 툭 툭 걷어찬다. 
나는 순간 두손에 깍지를 끼고 중얼중얼 장소에 어울리지않는 기도아닌 기도를했다.

"내 낭군이 저런 남자 아닌것이 하나님 너무 감사해요."

내 모습이 꼴불견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내가 개 주인인줄 아는지 째려보는 눈이 섬칫하다.
"니미 씨~퍼얼...개새끼 주인 당신이야?"

대답대신 고개를 돌렸다.
길가에라도 옮겨놓으면 좋으련만 씨퍼얼을 수없이 남기며 그냥 가는 운전자의 모습...
사람의 이기가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후~~
아무리 짐승이지만 생사를 앞에 두고 있는 생명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이 험한 세상을 실감 나게 한다.
점점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 해지는 것 같아서 싫다.
누가 신고를 했는지 폴리스 차가 도착하고...

"사람 사건 사고도 모자라서 개까지  더하기 해준다 이거지?"

허허 웃는 미소년 같은 경찰을 향해 눈인사를 했다.
"아직 살아있는데 병원가도 살릴수는 없을것같고...목끈 안하고 다니시면 신고 대상이라서 일단 신고가 접수된거니까 두분 함께 가셔서 적당히 타협하시지요, 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개죽음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아무 말없이 돌아서서 왔다.

"아줌마 개 아니예요?~~"

나 원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