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한강을 건너 사대문안에 사시던 작은아버지 댁에 가시면 언제나 맛있는 과자와 쵸콜릿 사탕을 가지고 오셨다. 그날도 연년생인 언니와 나는 긴 봄날을 울타리 밑에서 소꿉놀이를 했다. 빨간 벽돌을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고 들풀을 짓이겨서 김치를 담그고 흙으로 밥을 지어놓고 할머니가 오시면 드리겠다고 하며 놀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소중하게 접은 베 보자기를 주시며 들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언니를 우물가에 데리고 가서 얼굴과 손을 닦여 손을 잡고 오셨다. 그리고 나는 얼른 가서 혼자 닦으라는 것이었다. 몸이 약했던 언니는 공주 대접을 받으며 그렇게 보호를 받고 자랐고 나는 늘 무수리가 되어 심부름을 해야했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했다. 먹거리가 있을 때면 좋은것은 언니 먼저고 많은 것은 항상 언니 몫 이었다. 연년 생으로 태어나 젖을 미리 빼앗아 먹어서 언니는 약하고 나는 살이 탱글탱글 쪘다며 언제나 나의 차지는 나중이었고 조금이었다.
세수를 하고 돌아오니 베 보자기에 있던 그 큰 사탕을 게눈 감추듯이 다 먹었냐고 야단을 치시는 것 이였다.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데 욕심쟁이가 되어있었다. 꿀돼지가 되어있었다.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빌고있는 두 손위로 후드득 눈물, 콧물이 떨어졌다. 베 보자기에 싸여있던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로 내 작은 그 손등을 톡톡 때리는 할머니가 정말 미웠다.
할머니가 베 보자기에 싸 가지고 온 것은 솜사탕이었다.
얼마나 야속했었던지...
그렇게 언니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은 20년이 넘도록 한결같았다. 우리는 자라 어느 듯 어른이 되었고 언니는 결혼을 했다. 할머니는 언니가 언제 올지 손꼽아 기다리셨고 언니는 용돈도 풍족하게 드렸고 할머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해드렸다.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고 부모님에게보다 더 애틋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언니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았고 할머니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던 10월의 어느 날 83세 할머니는 백도복숭아가 잡숫고 싶다며 올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한동안 오지 않는 언니를 무척 기다리셨다. 기다리는 모습이 나의 마음까지 쓸쓸하게 했다. 나는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대문에 들러 백도 3개 샀다. 할머니는 너무나 맛있게 2개를 잡수셨다. 한 개를 남기시며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내가 널 많이 기다렸어, 복숭아가 먹고싶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할머니는 나를 언니로 착각하고 계셨다.
"애야~ 늬 동생 시집 좀 보내라 시집갈 준비 다해놓았는데 계집애가 핵교만 맨날 왔다갔다하니 복숭아 살 돈도 없지, 늬가 준 돈으로 내가 복숭아 사먹으면 되는데 저 불쌍한 것 시집갈 때 줄라고 돈 통을 막아버렸어."
화초장 안에서 꺼내 보여주는 반짇고리와 열어 볼 수 없도록 수 십 차례 돌려 묶은 검정 고무줄 끈을 풀어 열어본 작은 경대 안에는 차곡차곡 모아놓은 많은 지폐가 있었다. 그 중에는 이미 바뀌어 쓸 수 없는 화폐도 있었고 금붙이들도 여러 종류 있었다. 자식들과 언니가 올 때마다 주고 간 용돈이나 선물들 같다. 내 혼수 준비를 하셨다는 말에 울컥 목이 메었다. 내리사랑의 평범한 진리를 곡해하고 살아온 못난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할머니를 꼭 안아 보았다. 너무 작고 앙상한 몸은 내 품에 쏙 들어왔다. 아마도 마음먹고 안아본 것은 살면서 처음인 것 같았다.
"할머니 똥싸지 않을 거지?. 건강하게 살아야해, 알았지? 내가 할머니한테 이제 잘 할게. 알았지?"
다음날 아침 화장실 변기 머리 동그란 부분에 얼굴을 대고 잠드셨다.
철들자 망령 난다는 옛말이 있다.
효도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말도 있다.
요즘은 있을 때 잘해 라는 말도 있다.
할머니께서 복숭아를 못 드셨으면 나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날 그 작은 몸을 꼭 안아보지 못했다면 내 마음이 얼마나 쓰렸을까.
할머니에게 단 한번 만이라고 공주가 되고싶었던 어린날의 추억이 내게도 있었다.
할머니 올해가 쥐띠 해라는데 올해 나는 사랑 받는 팥쥐 할까, 착한 콩쥐 할까?
할머니 그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