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0일 목요일

가난한 마음



세상의 부요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어서 오라 하시니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왔습니다.

발걸음보다도 더 무거운 마음 놓아둘 곳이 없어
염치없지만 그 마음 조차도 짊어지고 왔습니다.

인생의 쓰디쓴 근심 덩어리 그 무게에 짓눌려
넘어질 이제서야 당신 발아래 납작 엎드립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안아주시는 그 사랑 너무 벅차
부여안은 작은 가슴 숨조차 쉬기 힘들어 집니다.

당신께 드릴 귀한 예물도 값비싼 향유도 물론 없지만
내 두 눈에 눈물로 당신의 발을 닦아드리렵니다.

주인의 주인 되신 주님!
내 마음이 가난합니다.
감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2005년 10월 5일 수요일

내 마음 깊은곳에



이슬비 내리는 새벽길을 달려서 도착한곳 굴비가 유명하다는 법성포다.
비린내가 코를 자극했다. 구역질하는 나와는 달리 생선 썩는 냄새와 비릿한 부둣가 냄새가 좋다는 그분의 말이 이상했다. 그리 멀리까지 보이지 않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던 어두운 그의 얼굴이 몹시 쓸쓸해 보였다. 이유를 물어 볼 수도 없고 눈치조차도 차릴 수 없었다. 누구의 기분이나 감정 따위는 상관없이 나의 모자란 생각은 비린내 나는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상점에 들어가 흥정을 하고 상자에 포장되어있는 상품의 굴비 20두름을 구입했다.
다시 나의 짧은 생각은 거금을 들여서 많이 구입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무엇 하려고...그렇지만 묻지 않았다. 승용차 뒷좌석에 차곡차곡 싣고 트렁크에도 실었다.
인심도 좋다. 집에서 드세요, 하며 비닐봉투에 10여미리 더 넣어준다.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온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안타까운 연인들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한 노랫말이다.
한참을 달리다가 고속도로 휴게실에 도착하였다.
여러 곡이 들어있는 것으로 테이프를 한 개 샀다.
"공주는 외로워~"
노래가 나온다.
"이런 노래 싫어하지...?"
묻는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외치는 노래가 이어져서나오니 또 물어본다.

"이런 노래 싫어하지...?"
또 좋아한다고 말했다.
세상이 요지경이니까.
그렇게 하루의 여행을 마쳤다.

"운전하느라 고생했다."

"그럼 고생했지요. 냄새 참느라고..."

나의 대답에 빙긋이 웃던 그 모습이 그립다.
그대 세상 버린지 325일째 되었습니다.
지금에서야 그 비린내나는 법성포 나들이의 의미를 깨닫다니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2005년 9월 26일 월요일

소심한 아이를 위하여



 
지금은 많이도 변해있는 강남의 대모산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몇 해전 졸업을 했지만 가끔 토요일이면 중학생이던 나의 딸들은 봉사활동 이라는 명목으로 그곳에 간다.
비닐봉투와 집게를 들고 손에는 면장갑을 끼고 휴지를 줍는다.
그곳에 다녀오면 몇 시간의 봉사활동 점수가 주어지고 내신 성적에도 반영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때는 어떠했는가?
토요일이면 송충이를 잡으러 대모산에 올랐다.
짝꿍과 한팀이 되어 서로 상대방이 잡은 송충이를 세어준다.
점수도 주어지고 가장 많이 잡은 학생은 공책이 상으로 주어지기도 했다.
소나무 가지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고 물 담은 미제 깡통에 잡아넣는다.
칭찬받고 싶어서 열심히 잡는다.
송충이 털이 땀으로 젖은 목덜미나 팔에 묻으면 따갑고 쓰리고 벌겋게 부어오른다.
그래도 칭찬받으려고 열심히 잡는다.
개수를 세다가 행여라도 마릿수가 틀리게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한 마리 두 마리 큰소리로 상대방이 잡은 마릿수를 세어가며 잡는다.

18…. 내가 소리쳤다.
친구가 잡은 개수다.
19……. 친구가 소리쳤다.
내가 잡은 개수다.
한나절이 지나고
선생님께서 "자~ 그만" 하시면서 호루라기를 불어 우리를 부르셨고 몇 마리씩 잡았는지 본인이 잡은 숫자를 차례대로 말하라고 하셨다
친구와 나는 징그럽게 꾸물거리는 송충이깡통을 무슨 보물이라도 바라보듯 하면서 흡족해 하고 있었다.

"누가 제일 많이 잡았을까……."
하시며 깊이 파놓은 구덩이에 송충이를 쏟으라고 하셨다.
호명에 따라 숫자를 부르면 선생님은 기록을 하셨다.

"조 상열 몇 마리?" 19마리요." 오~ 많이 잡았구나! 아직까지는 상렬이가 1등이네……?"
"zooin 몇 마리?" 
'제가 19마리 구요…. 상렬 이는 18마리예요.'

일러바쳤다.
내가 1등이다.
공책은 내가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다음 차례 송충이를 구덩이에 쏟아 부으셨다.
나는 친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선생님께 바로 말씀드리라고 말했지만 친구는 혓바닥만 낼롬 내밀 뿐 이었다.
순간 머릿속은 온통 송충이 한 마리를 바꾸어서 말한 상열 이의 비열함 때문에 울화가 치밀었다.
산에서 곧바로 종례를 하시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벌거숭이산을 푸른 산으로 만드는데 큰 몫을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송충이 개수가 바뀐 것에 대하여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하교를 하고 집으로 오면서 송충이 한 마리 때문에 친구와 티격태격했다.
그렇지만 기운이 장사인 남자 친구와 결투를 하기에는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기에 끙끙 속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 엉엉 울기 시작했고 소심하기 짝이 없다는 꾸지람과 결국에는 아버지께 몇 차례 얻어맞고 훗날 큰 인물이 되려면 통이 커야 한다는 긴 설교로 끝이 났다.
얼마 후 여름방학을 하게 되었다.
생활 통지표 '학교에서 가정으로' 난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학업에 열심이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모든 일에 모범이 되는 학생입니다.
칭찬해주세요."

'가정에서 학교로' 난에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쓰셨다.

"대모산 송충이 19마리는 우리 아이가 잡았답니다.
칭찬해 주십시오."

 
월간 샘터 2005년9월호 게재. 

2005년 9월 23일 금요일

하느님, 배불러도 죽습니까?

사업체 문을 닫은 후에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지냈다. 
1년이 지나도록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예전 거래처 사장 말고는 별로 만난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오전에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는데 경비실에서 인터폰이 왔다. 
아무개 씨가 방문했다고 한다. 
누구더라…? 가물가물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잘 생각도 나지 않는 사람의 방문을 받고 잘 모르겠다 고하니 "저예요. 저예요."를 반복한다. 출입구 비밀번호를 몰라 출입이 안되어서 경비실로 갔단다. 무슨 일로 방문 하셨느냐고 묻자 길어 질 것 같은 방문 설명이다. 경비과장이 하는 말 내려와서 확인을 하란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고 했던가?
거래처 운전기사였는데 그 사람은 우리공장에 도착하면 언제나 배가 고프다는 사람이었다. 
올 때 인사는 "먹을 것 좀 없나요?" 갈 때 인사는 "원수지고 갑니다. 연말 정산할게요." 하는 그는 늘 배고파 보였고 먹을 것을 찾았다. 총각같이 보이는 그 사람의 배고픈 표정도 늘 웃는 모습도 오랜 날이 지나가도 변하지 않았다. 
 밤늦도록 일하는 사람이 배고픔을 참고 버틸때는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모습이 안쓰럽기도 했고 현장에 비상 식량으로 있어도 좋을듯하여 사무실에 초코파이와 컵 라면을 box로 사다 놓았었다.
그 총각이 찾아왔다.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우리 딸의 유난히 긴 머리를 보고 한눈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방학동안에 공장 현장사무실에 두달 동안 아르바이트 할 때 안면이 있었다. 
그 총각이 우리 딸을 소리쳐 부르니까  쳐다보며 "어머! 배고파 아저씨!" 이렇게 대답 했다며 지난날 먹던 컵라면의 맛을 잊을수 없다고 했다.

딸아이가 주소를 알려주어서 찾아 왔노라고 했다. 연말 계산을 꼭 하고 싶었는데 사업장이 없어져서 마음이 아팠다는 말과 너무 고마웠었다고, 꼭 보고싶었는데 이제야 찾았다고 기뻐했다. 
그 사람은 기어코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타고 온 자신의 9인승 승합차로 나를 안내했다. 
10분 정도 걸렸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갈빗집에 도착했다.
6개월 전 그가 다니던 직장도 어려움이 닥치면서 부도가 나는 통에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는 식당주인이 되어있었다. 요즈음 장사가 안되어서 기운이 없단다. 
갈비에 냉면에 생 과일 주스에 커피, 수정과, 아이스크림, 그리고 딸기까지. 
뜯고, 깨물어먹고, 퍼먹고, 마시고…. 
집에까지 태워다주면서 다음에는 온 식구를 초대한다고 함께 오라고 신신 당부를 한다. 
꼭 한우로 생갈비를 준비해 놓겠다는 마음 씀씀이가 풍요롭고 보기 좋았다.

오늘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는 총각이 아니고 튼튼하고 복스런 아내와 세 살 된 귀여운 딸아이가 있었다. 너무 없는 사람들끼리 가난하게 시작한 결혼생활이라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했고 함께있는 시간이 적은만큼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그들 약속중에는 하루의 한끼는 꼭 집에서 함께 먹기로 했었다고한다. 반찬 없는 밥을 아내혼자 먹게 할수는 없었다고했다. 
야근할 때 지급되는 저녁 식권은 모았다가 매점에서 아이 분유로 바꾸어 가지고 들어왔다는 그의 지난날 이야기를 들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온 그들에게서 내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따뜻한 또 다른 부부의 행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관심을 잊지않고 기억하는 마음의 소유자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또한 행복하게했다.
그러나, 꼭 원수를 갚겠노라고 말은했지만 라면의 원수를 이런식으로 갚다니……! 
작은 관심이 큰 감동으로 돌아온 이 행복한 순간에도 마냥 여유 로울수 없는 이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아 ~  하느님! 하느님!! 배불러도 죽습니까?"
  

2005년 9월 20일 화요일

수열아~

수열아! 
그대의 이름이 바뀌었구나.
미망인…
20년?
15년?
기억도 아득하다.
왕고들빼기 뜯으러 들판을 헤메이고 다니던 우리가 젊었던 그날들 생각나니?
그것을 삶아 나물 무치고 그것을 짓이겨 하얀 즙이 검게 변한 쓰디쓴 생즙을 만들어 "상처에 좋대요…" 라고 하면 너의 그 말 한마디가 끝나기가 바쁘게 "꿀꺽" 마시던 너의 남편이 눈에 어린다.
박하사탕 한개 입에 넣어주면 빙긋이 웃던 그 얼굴도 생각나고…
썩어 들어가는 발가락 과 복사뼈를 메스 대고 긁어내던 너의 모습도 기억에 남아있고 아픔도 못 느끼며 치료하는 손만 바라보는 너의 남편이 너무 측은해서 울컥 목이 막혀올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로 들어갔던 적도 있었지.
지난 기억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고 목이 메인다.

병원이 집보다 더욱 집 같았다는 지긋지긋한 병원생활 이제는 모두 끝내고, 너의 사람 하늘나라 가셨구나.
우리는 그 길을 일부러 계획하고 목적하지 않아도 이미 정해져있는 목적지이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이별의 아픔이지만 그래도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물론, 어느 누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야 하는 길을 우리보다 조금 먼저 가셨을 뿐이지만 말이야.
강건해야 환갑 장수해야 100년이라는 세상살이를 나라를 위하여 싸우셨고,
젊음을 그렇게 고엽제 침투 속에서 고생 하셨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셔서 참 보기 좋았었지.
몸은 쇠약하여도 수열 이가 함께 있어서 슬픔보다 기쁨이 많은 삶이라고,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시던 분.
이제는 "수열아! 수열아!!!" 하며 이름 불러줄 그분이 안 계시구나.

젊은 나이에 물질 만족도 못 시켜주고 성적 만족도 채워주지 못해 늘 미안 하지만 마음만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널 사랑한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수열아! 사랑해!' 를 입버릇처럼 말하면 넌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잃지않고 '국어시간 되었네' 하며 덤덤하게 받아 넘기던 너, 그런 너의 말과 행동은 내가 봐도 사랑 스런 여인 이었어.
그런 너를 정말 너무 많이 사랑해서 그리도 오래 끄나풀을 쥐고 모진 목숨 연명하시더니 기어코 60세 생신을 채우지 못하고 그렇게 가셨구나.
딸셋, 아빠없이 결혼 시킬 훗날을 염려 하면서 못내 아쉬운 마지막 이별을 맞으셨다지?
본향 찾아가는 마지막 길 앞에 애 끓는 그 모습을 가족들이 추억할 때 마음 저림이 덜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수열아!
가을이다.
시원해서 좋다고 금방 말하고 돌아서면 마음속이 허전하고 쓸쓸함을 느끼게하는 가을 바람은 참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많은 장난을 치는 것 같애.
지금 아직은 혼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다고 말했지만 가을 바람 앞에서는 빈 깡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다고, 누군가가 혼자 사는 여자라고 지나치듯 한 말에 분노하고, 허전함도 실감한다는 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성서에 나오는 과부의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그래! 울지 말아라.
남들이 하는 말에 분노 하지도, 서운해 하지도 말고 말이야!
어쩌면 혼자라는 것이 미망인이라는 말이 과부라는 단어가 허전하고 텅 빈 마음에 비수로 와서 꼬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실임을 어찌하겠니.
너무 오랫동안 몸 고생과 마음고생까지도 동고동락한 너희부부 정말 그 동안 애쓰고 고생했다.

돌아 가신지 벌써 4개월이 되었고 이제 안장식을 모두 마쳤으니 그분도 이제는 편안한 집에 거하신것 같아 마음이 푸근하게 느껴진다.
이 가을의 바람도 나무도 잔디도 그리고 조화이긴 하지만 수만송이의 꽃밭 안에 둘러싸인 국립묘지의 수많은 묘비를 보면서 우리가 살고있는 아파트처럼 많은 분들이 모여 계시니 사후 세계일 지라도 외롭지 않을것 같은 느낌이 들더구나.
살아 생전에 더 살갑게 대할것을, 신경질 내지 말것을, 많이 만져 줄것을…
독백처럼 되뇌이는 자책 같은 말도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도 이제는 너에게서 한발짝 뒤로 물러섰으면 하는 바램이있다.
이제 슬픔거두고 그 동안의 희로애락을 추억하며 살아라.
너무 애통해하면 주름 생긴다.
몸 추슬러라.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대로 우리만의 아름다운 가을을 느껴 보자꾸나… o k?

고 방영순님!
병마의 고통 속에 살아오신 날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아픔 없는 하늘나라에서 명복하소서!

- 대전 국립묘지 안장식에 다녀온날 수열에게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