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0일 화요일

내리사랑

이탈리아의 작가 지오반니 파피니가 무서운 병에 걸렸을 때 그의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이 그의 어머니에게 인육(人肉)을 먹여보라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칼로 자기의 허벅지 살을 잘라 요리해 아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엽기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인하여 병이 차츰 낫기 시작하자 그는 그 고기를 또 한번 먹기 원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또, 자신의 살을 베려다가 그만 동맥을 잘라 정신을 잃고 말았다. 외출에서 돌아온 지오반니 파피니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어머니, 지난번에 먹은 고기도 어머니의 살이었군요!”하며 오열했고 어머니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아들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당부했다고한다.

“나는 죄 많은 몸으로 너를 구했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몸으로 우리를 위해서 살을 찢기시고 피 흘리셨단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 후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지오반니 파피니는 ‘그리스도의 이야기’ ‘떡과 포도주’ 등을 저술하였고 남은 여생을 복음 을 전파하며 살게 되었다고한다.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의 힘때문 이었다.
이 글을 접하며 나를 들여다보니 부모님께 받은 사랑은 당연지사(當然之事)로 알고 살아간다. 
얻어들은 풍월은 있어서 자식사랑 내리사랑이라고 말은 청산유수(靑山流水)로 잘도 주절거리지만 사실 어머니 나이 많아 새벽 전화 울릴 때면 가슴 철렁 내려앉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전화벨에 심장 떨어뜨릴 바에야 얼른 달려가 뵈면 될 것을 핑계거리 왜 이리 많은지 그게 잘 안 되는 것도 병중에 몹쓸 큰 병이다.
이런 자식 위해 맘졸이며 염려하고 기도하시는 어머니사랑을 알게 모르게 외면한 채 살아간다.
부모에게 효도를 더디 하지 말라는 성인의 말씀은 한 줄의 책으로만 읽었을 뿐, 실천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마음만 무슨 연고로 간절한 척 하는지!

순간, 
"온라인으로 용돈 부쳤어 예 엄니!"

"택배로 옷 한 벌 사서 보냈어 예 엄니!"

나 나름대로 방식 만들어 이것이 효도인양 위세를 떨어보고 가끔은 큰 소리로 떠들어대지만 착각이다.
얼굴보기 포기하고 전화 목소리라도 길게 잡으실라 치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것 처럼 다시 전화하겠노라 통화종료 꾹 누르고 내 새끼 옆에 달고  좋아하는 야구장으로 달려가 목구멍 울대가 거부할 때까지 궥궥 떠든다. 성대가 찢어졌다나 부었다나 고까짓 아픔에 내 자식 남겨두고 나는 어찌 눈감을까 하는 염려로 임종을 눈앞에 둔 것처럼 눈물 바람 일으키며 또 힘 뺀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부모님 앞에서 말썽만 피우던 청소년 시절도 좀 산다고 거들먹거리던 한때도 되돌아보면 어리석음 투성일 뿐이다.  100년도 못살아낼 인생살이 젊음은 어디 갔는지 그 세월 모두 떠나 버리고 나도 어느덧 언덕 아래를 바라보는그 길에 줄서기 한다. 순간적으로 이럴 때는 제 정신 옳게 돌아온 듯 잠시 어머니 생각에 전화기 숫자 꾹꾹 누른 후 전화기 으스러질 정도로 힘주어 움켜지고 응석 섞인 말투로 "엄마" 하고 불러보니 반갑고 행복한 어머니의 음성이 표정까지 그대로 보이는듯한데 기껏 또 이 무슨 해괴한 언사란 말인가!

"엄마, 나 목이 찢어졌대요. 치료받고 좀 나으면 갈게요."

이런, 또... 생각 없이 전했다.
아프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눈두덩이 뜨겁고 목이 메이신 모양이다.

"효도라는 말은 이제 그만 두라고...! 마음 편케 해 드리는 것이 효도지..."
스스로를 또 혼낸다.
어머니가 내려주는 사랑을 '꿀꺽' 받아 삼킬 줄만 아는 불효자 늘 생각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말일수도 있겠다. 나는 또 내리사랑에 짓눌려 잠시 후면 어머니의 마음을 잊어버릴 지도 모르므로...
알면서 실천 없음이 더욱 나쁜 것, 머지않아 땅 치며 후회 할 모습이 뻔히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크신사랑 앞에 백만분의일 이라도 보답해야지. 잘해야지! 다짐하고 다짐한다.
엽기적이긴 했지만 살신 사랑 살신 전도를 했던 지오반니 파피니의 어머니처럼 내 어머니의 떨리는 간곡한 음성이 들려온다.

"목소리는 괜찮구나! 그만하길 다행이다. 범사에 감사해라. 쉬지 말고 기도해라.
그리고 목구멍이 찢어진데는 똥물을 먹으면 빨리 낫는 다는데 어디가서 구할꼬...?"  
 


2005년 5월 7일 토요일

노래도 세대 차이

티비를 보는데 아주 어린아이가 가요, 팝송을 너무 잘 부른다. 
보는 이들이 모두 놀랜다. 방청객들은 '우~~~우~~" 소리를 친다. 춤도 잘 춘다. 낙지 다리가 저리도 유연할까... 
그 어린이는 사랑의 표시를 손으로 만들어 입 맞추고 앞을 향해 그 사랑을 뿌리는 제스츄어를 멋지게 한다.

놀랜 표정을 짓고있는 내 입에 남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가 나갈 만큼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내가 저 만할 때는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기억을 더듬어본다.

가요? 기억에 없다.
팝송? 기억이 안 난다.
완전히 정치인들 청문회 대답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기억들도 있다.

초등학교 때 소풍가면 빠지지 않고 꼭 수건돌리기를 한다. 
걸리면 노래를 시킨다.
맨처음 남자 친구가 걸렸다.
친구들이 둥글게 앉은 가운데로 나가 서서, 차렷! 경례...선생님 구령에 맞춰 인사를 하고 손바닥은 쭈~욱 펴서 다리 옆에 철썩 붙이고 누가 밀어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부동 자세로 노래를 부른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으~앙~ 울어버린다.

즐거운 소풍날 달을 쳐다보며 외로움을 노래하다 기어이 울어버린다.
그 다음 내가 걸렸다. 나도 구령에 맞춰 인사를 한 다음 두 손을 모아 꼭 쥐고 배꼽과 가슴 중간쯤에 얹어 놓은 자세로 다리를 폈다 오므렸다 하며 부르는 부른다.

뜸북뜸북 뜸북새 산에서 울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 적에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으~앙~~나도 울어 버렸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웃음이 난다.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밝은 대낮에 달을 보며 외롭다는 노래를 부르고 봄 소풍에서 가을을 노래하며 울어버리던 순진했던 우리세대의 모습은 지금 어린이 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놀랍다.


2005년 5월 6일 금요일

봄처녀의 마음으로

사람의 발길이 무수히 지나다니는 아파트 입구 화단 옆 돌 틈 사이로 여러 차례 밟힌 상처흔적이 남아있는 민들레 한 포기가 예쁘게 웃고있다. 
잎사귀 가운데로 꽃대가 벌줌 하니 여러 개 올라와 노랑꽃을 피웠다. 봄이 오면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민들레꽃이건만 언제 사람들 발길에 밟힐지 모르는 곳에서 피어난 민들레 노랑 꽃 은 더욱 예쁘고 귀여웠다.

"너. 생명력 참 대단하다."
 
혼잣말을 하고있는데 사내아이가 피아노 학원 가방을 들고 내 옆에 서서 말한다.

"아줌마 저번 날 내가 밟았는데 또 살아났어요."

"그랬구나!"

"그래서 '민들레야! 미안하다' 그렇게 내가 말했어요. 그래서 꽃 핀 거예요. 우리 엄마에게 말했더니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이제는 안 밟아요."

금세 여러 명의 어린이가 몰려들어 예쁘다는 말을 한마디씩 해준다. 아이는 큰 목소리로 말한다.

"너희 이 꽃 밟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

부탁인지 명령인지 힘있게 한마디를 남기고 학원 늦었다며 뛰어가는 사내아이의 모습이 제법 의젓해 보인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민들레는 노랑 민들레, 흰 민들레, 서양민들레, 한라 민들레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요즘은 우리 것이 아닌 서양민들레가 많다고 한다. 우리 민들레나 서양 민들레나 꽃의 색깔, 잎의 모양은 거의 비슷하지만 꽃을 받쳐주는 꽃받침 잎이 다르다. 우리 민들레는 차분하고 질서 있게 꽃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지만 서양민들레는 꽃받침 잎이 밑으로 젖혀져 있기 때문에 꽃을 받쳐주기 싫어서 어깃장 놓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일편단심 민들레야'라는 대중가요 노랫말도 있듯이 우리 땅에서 자란 토종 민들레 절개가 굳은 식물이라서 서양 민들레와는 사랑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토종 민들레는 자기가 좋아하는 신랑감도 토종 민들레의 꽃가루가 날아오지 않으면 절대로 받아드리지 않으며 일편단심으로임 을 그리다가 끝내는 처녀임신을 하여 씨를 날려보내어 결국 그 민들레 씨는 발아되지 못한다고 한다. 달걀로 치자면 무정란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일편단심 토종 민들레는 차츰 그 개체수가 줄어드는 형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서양민들레는 어찌나 고집스러운지 10개의 잎이 나온 것을 모두 잘라내면 즉시 11개의 잎을 만들어 자라며 뿌리를 여러 토막으로 잘라서 땅에 뿌리면 모두 각자 새싹이 나오고 한 포기의 민들레로 다시 태어나는 생명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토종이고 잡종이고 가리지 않고 모두 날아오는 대로 받아들여 거의 100% 발아가 되므로 수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 기후에 맞게 변화되어 토종? 이 되어간다고 한다. 하긴 우리 땅의 정기를 받고 자라면 우리의 것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민들레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러 가지 질병에 민간요법이나 한방에서 약으로 쓰이고 있으며 몸에 좋은 식물이다 보니 동서양 어디에서나 먹거리로 이용하는 예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요리에는 민들레 샐러드 인기가 대단하다는데, 오늘 내 몸이 요구하는 보약을 구하러 들판으로 나가보련다.

봄처녀의 마음으로.



2005년 4월 17일 일요일

어느 봄날의 추억



봄이 되면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시댁에 갔던 날이 생각이 난다.
그날은 어느 날보다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시부모님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점심을 먹은 뒤, 남편과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개울가로 나갔다.그이는 쫄 대를 들고 나는 양동이를 들고 신이 나서 종종걸음을 걸었다. 논두렁 옆에 흐르는 도랑이 나오자 신이 난 김에 나는 껑충 뛰었다. 그런데 발 밑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예사롭지 않더니 "퍽"하고 미끄러져 엎어지고 말았다. 양동이는 도랑에 머리를 박았고 무릎에 피가 났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버둥대고있는데 저만치 앞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는 남편은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앞만 향해 전진하는 저 사람이 내 남편 맞나? 정말 얄미워서 부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한참을 가다가 그제야 내 부재를 눈치챘는지 뒤를 돌아본다. 마누라가 이렇게 엎어져 있으면 놀래서 달려와도 모자랄 판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한다.


"뭐해? 빨리 와!"


"나 못 가! 아프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철부지 아이처럼 소리를 질렀고 부랴부랴 달려온 남편이 그제야 물어본다.


"다쳤어?"


"보면 몰라?"


"어쩌다가 넘어졌어. 조심하지!"


"소똥에 미끄러졌어! 똥이 다 묻었어."


"하하, 하필이면 소똥에 넘어지냐?"


"그럼 어디에서 넘어져야돼?"


신경질이 나서 시비도 걸어보지만 남편은 연거푸 웃기만 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얄미웠던 남편이 웃자 금방 내 마음도 풀렸다. 퉁퉁 부은 발목이 일어서지도 못하게 아파 물고기 잡는 건 포기하고 도랑물에 소똥 묻은 것을 닦아내고 그이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두고두고 남편은 그 일을 가지고 나를 놀려댔다.


"소똥에 미끄러져 넘어져 가지고는 손이며 바지에는 똥으로 범벅이 되어 가지고는…."


어찌나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지 이제는 두 손 발 다 들었다. 그런데 작년 봄 어느 날 뉴스에 멸종 위기에 있는 쇠똥구리가 나타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자 남편 야릇한 표정과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 "쇠똥구리? 흐흐흐" 한다.


"쇠똥구리가 뭐?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봐?"


"몰라서 물어? 쇠똥~ 소똥~ 흐흐흐"


남편은 그 저 그 이야기를 몇 번이나 우려먹는다. 쇠똥구리 뉴스에서 또 그 사건을 떠올릴 줄이야! 어쨌든 우리는 그날 맥주를 마시며 또 한번 고향 생각에 젖었다. 소똥에 미끄러져 넘어졌던 사건은 당연히 대화의 화 두였고 그로부터 시작해서 쇠똥구리를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밤 깊어 가는줄 모른다.
올 봄에도 시댁으로 봄나들이를 가야겠다.

2005년 4월 11일 월요일

호텔 커피 마시던 날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녁나절 만나기로 했는데..... 어떤 모습일까? 
남편에게 말을 해야하나? 그이가 알면 혼 날 테니까 일단은 속여야 되겠다.
남자친구를 만난다는 사실이 재미도 있고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어서 일도 못하겠고 싱숭생숭 하다. 분명히 나이를 먹었는데 마음은 스무 살이다. 이러다가 바람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마음은 바람이 들어가서 날라 다니는 것 같다. 그 옛날 어린 날에 했던 너무 웃기는 말들도 생각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해도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했던가? 시 같은 말만 골라서 하고 세상의 고민은 혼자 다 짊어진 듯 바바리 깃을 세우고 온갖 개 폼 다 잡던 친구가 정보처 기관을 통해 나를 찾았다. 친구의 목소리가 잔잔히 떨렸다. 늘 그 앞에서는 비운의 주인공처럼 가녀린 듯 창백한 모습만 보이며 내숭 떨던 나 오늘도 만나면 내숭을 떨어야 하는 건가? 
너무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그 유치하고도 유명한 말을 영화배우 최무룡 김지미 부부보다 먼저 한 사람이 그 친구였다. 그는 왕자님 나는 공주님 이라도 된 듯이 착각 속에 살던 그때는 어른인줄 알았었지만 돌이켜보면 뻔한 생각과 행동들이 웃음밖에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30년만에 만난다니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만나면 손을 잡을까? 
아메리칸 스타일로 포옹을 할까? 
두근거림을 어찌해야 좋을지 감당이 안 된다.

머리는 어떻게 할까.
별로 덥지 않으니 정장을 입을까?
립스틱 색깔은?
속눈썹도 붙일까?'
내가 왜 이러는 거야? 
이옷 저옷 입어보고 붙여보고 그려보고 별의 별 짓을 다하다가 모두 포기하고 꺼내 놓은 옷들을 제 자리에 다시 정리한 다음 원래대로 쌩얼 화장으로 고쳤다. 생 머리 그대로 가지런히 묵고 긴 팔 남방에 주머니 옆이 살짝 헤어진 청바지에 캔버스 운동화를 신었다. 오늘은 완전히 뒷 모습만 대학생이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오전 내내 컴텨 앞에서 여유 부리며 놀다가 오후 내내 들뜬 기분에 시간이 길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점점 다가오니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이려고 거울 앞에 붙어있다. 몸도 마음도 점점 바빠지고 있는데 이때 하필이면 금요일 날 출장 간다는 남편의 보고 전화다.

"그런 말은 집에 들어와서 해도 되는데...나 바빠 끊어요."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도착했다.
친구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택시에서 내리는 나를 보자 친구는 자연스럽게 손도 잡고 어깨도 감싸준다.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할까하고 고민한 상상속에 설정은 괜한 짓이었다. 제 마음대로 붙잡고 안고 다 한다. 누군가는 말했지. 미국에서는 자연스런 인사법이라 괜찮으니 볼에 뽀뽀도 하라고. 생각은 했지만 못했다. 눈이 부신 흰 티셔츠에 미색 면바지 베이지 색 스니커즈를 신은 모습이 참 맑다. 마치 나와 한 쌍의 비둘기 같은 모습이다. 사전 모의라도 한 듯 옷차림이 통일이다. 느낌도 기분도 참 괜찮았다.

"언니는?"

"지금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내일 일 할 사람들과 만나서 횟집에서 미팅중이야. 너 만나면 그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너의 의견은 어때?"

"좋아. 그럼 그리로 가자고... 언니 빨리 보고싶어."

어머니 아버지를 미국으로 모셔가기 위하여 왔다는 남매는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묘지 이장 일이 지연되었다고 했다.
친구는 나의 손을 잡고 호텔 안을 가리킨다.

"잠깐 들어갔다가 가자."

"아~이! 언니도 없는데 호텔 안에를 왜~에 들어가...싫어."

가슴이 뛰었다. 30년의 세월은 어디로 싹뚝 잘려나갔는지 풋풋했던 20대 그 때 처럼 행동하는 친구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면서 나 자신도 20대 감정으로 상황이 흐르는듯 했다. 나를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계속 나를 잡아끌면 나 어떻게 처신하지? 이래서 사람들은 바람이 나는 거야. 나 어떻게 해...) 머리 속은 똑딱거리는 초시간 내에 후다닥 후다닥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잡은 손이 싫지 않았지만 내숭을 떨면서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 로비 오른쪽을 가리키며 하는 친구의 말이 에코를 넣은 듯 스테레오로 들린다.

"기집애...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니? coffee shop에서 차 한잔은 마시고 가야지~이~ 요~ 오~ 오~~"

호텔 커피도 마시고 노량진에서 회와 매운탕을 배가 찢어지게 먹고 들어 왔건만 속이 왜 이리도 허전한 것일까.꿈도 야무지지, 뭘 바랬었기에...? 내 안에 엉큼한 속물 근성이....? 
혼자 큰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