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버럭

국화꽃 한 다발을 들고 오랜만에 친구와 산에 올랐다. 
지난 봄 건강하게만 보이던 친구남편은 별안간 발견한 간암으로 입원하고 수술하고 사망하기까지 불과 한 달만에 그렇게 허망하게 가셨다. 신도시 개발로 땅값도 많이 오르고 좀 편히 살만해 졌는데, 사람은 한치 앞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간다. 친구 남편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산기슭에 눈이 내린 것 같이 하얗게 피어있는 밤꽃을 보며 금실이 유난히도 좋았던 친구가 울먹이며 말했다.

"올해는 나 혼자라서 밤 주우러 못 오겠다."

"집에서도 가까운데 자주 오면 되잖아. 가을에 밤 주우러 우리 함께 오자. 내년에도 하얀 밤꽃이 산을 덮으면 그때도 함께 오자."

자꾸 울고있는 친구에게 딱히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었다. 이별은 슬픈 거니까....
분위기를 바꿔 주려는 듯 남편이 내게 말했다.

"쥔아 늬 밤꽃 냄새 게안나? 역겹지 않나?"

그러고 보니 이른봄에는 아카시아 꽃향기가 너무나 좋았는데 전혀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콩국 할 때 약간 덜 삶아진 콩 냄새 같기도 하고 땀 냄새 같기도 했다. 우리는 풀꽃 향기의 이야기를 나누며 산을 내려왔다. 남편이 무심코 밤꽃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밤꽃이 피면 과부가 바람난다는 말을 한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을 텐데 과부라는 표현에 친구의 얼굴을 힐끗 보며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런데도 눈치 못 챈 그이는 밤꽃 향이 남성의 정액 냄새가 나기 때문에 외로운 여자들이 밤꽃이 피면 밤에 밤나무 아래에 나와서...

"아..이제 그만 좀 하지..."(버럭)

얼마 전에 탈상을 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어제 남편과 함께 친구를 찾아갔다. 산소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날 내 마음이 난처했던 생각이 나서 친구에게 그이야기를 하고 한참 웃었다. 올해는 밤 수확을 안 했다는 밤나무 아래로 갔다. 나무 잎이 가득 떨어져 발을 옮길 때마다 폭신폭신했다. 밤 송이는 사람들이 이미 따가고 없었지만 아직도 매달려있는 것도 가끔 보인다. 발로 눌러서 까면 밤이 튀어 나왔다. 낙엽을 들추면 알밤이 숨어있다. 처음에는 재미있었지만 밤을 까다보니 손끝과 손톱이 말이 아니다. 그만 가자고 열 번도 더 말했지만 다람쥐가 숨겨놓은 밤이 아직 더 많이 숨겨져 있다며 자꾸 뒤지고 있다.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친구가 속껍질을 벗겨 주는 대로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는다.

"아..이제 그만 좀 먹지...."

집에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 아기처럼 쌔근쌔근 소리까지 내며 곤히 잠든 남편 몹시 피곤했는가보다. 집에 돌아오니 피로가 몰려오고 감기가 오려는지 으슬으슬하여 좀 쉬려는데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낸다.

* 날밤을 너무 많이 먹었나보네... 내 뜻은 절대 아니다. ....
* 내 의지로는 해결이 안 된다, 쥔아 이해해라!
* 정말 못 참겠다, 우째 이리 내전이 안 끝나노? 쥔아, 미안타.

"아~ 정말 ....그만좀 하지."(버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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