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23일 금요일

하느님, 배불러도 죽습니까?

사업체 문을 닫은 후에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지냈다. 
1년이 지나도록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예전 거래처 사장 말고는 별로 만난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오전에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는데 경비실에서 인터폰이 왔다. 
아무개 씨가 방문했다고 한다. 
누구더라…? 가물가물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잘 생각도 나지 않는 사람의 방문을 받고 잘 모르겠다 고하니 "저예요. 저예요."를 반복한다. 출입구 비밀번호를 몰라 출입이 안되어서 경비실로 갔단다. 무슨 일로 방문 하셨느냐고 묻자 길어 질 것 같은 방문 설명이다. 경비과장이 하는 말 내려와서 확인을 하란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고 했던가?
거래처 운전기사였는데 그 사람은 우리공장에 도착하면 언제나 배가 고프다는 사람이었다. 
올 때 인사는 "먹을 것 좀 없나요?" 갈 때 인사는 "원수지고 갑니다. 연말 정산할게요." 하는 그는 늘 배고파 보였고 먹을 것을 찾았다. 총각같이 보이는 그 사람의 배고픈 표정도 늘 웃는 모습도 오랜 날이 지나가도 변하지 않았다. 
 밤늦도록 일하는 사람이 배고픔을 참고 버틸때는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모습이 안쓰럽기도 했고 현장에 비상 식량으로 있어도 좋을듯하여 사무실에 초코파이와 컵 라면을 box로 사다 놓았었다.
그 총각이 찾아왔다.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우리 딸의 유난히 긴 머리를 보고 한눈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방학동안에 공장 현장사무실에 두달 동안 아르바이트 할 때 안면이 있었다. 
그 총각이 우리 딸을 소리쳐 부르니까  쳐다보며 "어머! 배고파 아저씨!" 이렇게 대답 했다며 지난날 먹던 컵라면의 맛을 잊을수 없다고 했다.

딸아이가 주소를 알려주어서 찾아 왔노라고 했다. 연말 계산을 꼭 하고 싶었는데 사업장이 없어져서 마음이 아팠다는 말과 너무 고마웠었다고, 꼭 보고싶었는데 이제야 찾았다고 기뻐했다. 
그 사람은 기어코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타고 온 자신의 9인승 승합차로 나를 안내했다. 
10분 정도 걸렸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갈빗집에 도착했다.
6개월 전 그가 다니던 직장도 어려움이 닥치면서 부도가 나는 통에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는 식당주인이 되어있었다. 요즈음 장사가 안되어서 기운이 없단다. 
갈비에 냉면에 생 과일 주스에 커피, 수정과, 아이스크림, 그리고 딸기까지. 
뜯고, 깨물어먹고, 퍼먹고, 마시고…. 
집에까지 태워다주면서 다음에는 온 식구를 초대한다고 함께 오라고 신신 당부를 한다. 
꼭 한우로 생갈비를 준비해 놓겠다는 마음 씀씀이가 풍요롭고 보기 좋았다.

오늘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는 총각이 아니고 튼튼하고 복스런 아내와 세 살 된 귀여운 딸아이가 있었다. 너무 없는 사람들끼리 가난하게 시작한 결혼생활이라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했고 함께있는 시간이 적은만큼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그들 약속중에는 하루의 한끼는 꼭 집에서 함께 먹기로 했었다고한다. 반찬 없는 밥을 아내혼자 먹게 할수는 없었다고했다. 
야근할 때 지급되는 저녁 식권은 모았다가 매점에서 아이 분유로 바꾸어 가지고 들어왔다는 그의 지난날 이야기를 들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온 그들에게서 내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따뜻한 또 다른 부부의 행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관심을 잊지않고 기억하는 마음의 소유자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또한 행복하게했다.
그러나, 꼭 원수를 갚겠노라고 말은했지만 라면의 원수를 이런식으로 갚다니……! 
작은 관심이 큰 감동으로 돌아온 이 행복한 순간에도 마냥 여유 로울수 없는 이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아 ~  하느님! 하느님!! 배불러도 죽습니까?"
  

2005년 9월 20일 화요일

수열아~

수열아! 
그대의 이름이 바뀌었구나.
미망인…
20년?
15년?
기억도 아득하다.
왕고들빼기 뜯으러 들판을 헤메이고 다니던 우리가 젊었던 그날들 생각나니?
그것을 삶아 나물 무치고 그것을 짓이겨 하얀 즙이 검게 변한 쓰디쓴 생즙을 만들어 "상처에 좋대요…" 라고 하면 너의 그 말 한마디가 끝나기가 바쁘게 "꿀꺽" 마시던 너의 남편이 눈에 어린다.
박하사탕 한개 입에 넣어주면 빙긋이 웃던 그 얼굴도 생각나고…
썩어 들어가는 발가락 과 복사뼈를 메스 대고 긁어내던 너의 모습도 기억에 남아있고 아픔도 못 느끼며 치료하는 손만 바라보는 너의 남편이 너무 측은해서 울컥 목이 막혀올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로 들어갔던 적도 있었지.
지난 기억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고 목이 메인다.

병원이 집보다 더욱 집 같았다는 지긋지긋한 병원생활 이제는 모두 끝내고, 너의 사람 하늘나라 가셨구나.
우리는 그 길을 일부러 계획하고 목적하지 않아도 이미 정해져있는 목적지이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이별의 아픔이지만 그래도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물론, 어느 누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야 하는 길을 우리보다 조금 먼저 가셨을 뿐이지만 말이야.
강건해야 환갑 장수해야 100년이라는 세상살이를 나라를 위하여 싸우셨고,
젊음을 그렇게 고엽제 침투 속에서 고생 하셨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셔서 참 보기 좋았었지.
몸은 쇠약하여도 수열 이가 함께 있어서 슬픔보다 기쁨이 많은 삶이라고,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시던 분.
이제는 "수열아! 수열아!!!" 하며 이름 불러줄 그분이 안 계시구나.

젊은 나이에 물질 만족도 못 시켜주고 성적 만족도 채워주지 못해 늘 미안 하지만 마음만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널 사랑한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수열아! 사랑해!' 를 입버릇처럼 말하면 넌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잃지않고 '국어시간 되었네' 하며 덤덤하게 받아 넘기던 너, 그런 너의 말과 행동은 내가 봐도 사랑 스런 여인 이었어.
그런 너를 정말 너무 많이 사랑해서 그리도 오래 끄나풀을 쥐고 모진 목숨 연명하시더니 기어코 60세 생신을 채우지 못하고 그렇게 가셨구나.
딸셋, 아빠없이 결혼 시킬 훗날을 염려 하면서 못내 아쉬운 마지막 이별을 맞으셨다지?
본향 찾아가는 마지막 길 앞에 애 끓는 그 모습을 가족들이 추억할 때 마음 저림이 덜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수열아!
가을이다.
시원해서 좋다고 금방 말하고 돌아서면 마음속이 허전하고 쓸쓸함을 느끼게하는 가을 바람은 참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많은 장난을 치는 것 같애.
지금 아직은 혼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다고 말했지만 가을 바람 앞에서는 빈 깡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다고, 누군가가 혼자 사는 여자라고 지나치듯 한 말에 분노하고, 허전함도 실감한다는 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성서에 나오는 과부의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그래! 울지 말아라.
남들이 하는 말에 분노 하지도, 서운해 하지도 말고 말이야!
어쩌면 혼자라는 것이 미망인이라는 말이 과부라는 단어가 허전하고 텅 빈 마음에 비수로 와서 꼬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실임을 어찌하겠니.
너무 오랫동안 몸 고생과 마음고생까지도 동고동락한 너희부부 정말 그 동안 애쓰고 고생했다.

돌아 가신지 벌써 4개월이 되었고 이제 안장식을 모두 마쳤으니 그분도 이제는 편안한 집에 거하신것 같아 마음이 푸근하게 느껴진다.
이 가을의 바람도 나무도 잔디도 그리고 조화이긴 하지만 수만송이의 꽃밭 안에 둘러싸인 국립묘지의 수많은 묘비를 보면서 우리가 살고있는 아파트처럼 많은 분들이 모여 계시니 사후 세계일 지라도 외롭지 않을것 같은 느낌이 들더구나.
살아 생전에 더 살갑게 대할것을, 신경질 내지 말것을, 많이 만져 줄것을…
독백처럼 되뇌이는 자책 같은 말도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도 이제는 너에게서 한발짝 뒤로 물러섰으면 하는 바램이있다.
이제 슬픔거두고 그 동안의 희로애락을 추억하며 살아라.
너무 애통해하면 주름 생긴다.
몸 추슬러라.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대로 우리만의 아름다운 가을을 느껴 보자꾸나… o k?

고 방영순님!
병마의 고통 속에 살아오신 날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아픔 없는 하늘나라에서 명복하소서!

- 대전 국립묘지 안장식에 다녀온날 수열에게 친구가.- 

2005년 9월 19일 월요일

목숨건 모험

공원 길을 산책하는데 어찌나 버섯이 많은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잠시 흥분한 상태로 정신없이 버섯을 찍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에 달린 카메라를 들이대고 종류가 다르게 생긴 것은 골고루 찾아서 찍었다. 어찌나 버섯이 많던지 버섯 농장인 듯 착각을 할 지경이었다. 그중 한 종류는 예전에 잔디버섯이라고 불렀었는데…. 먹었던 식용버섯같이 생겼다. 들고 있던 신문으로 고깔모자를 접어 그 속에 버섯을 따서 담았다. 소나무 아래 한곳에 모여있는 버섯만 대충 따 가지고 돌아왔다.

깨끗이 씻고 소금에 절였다.
혹시 독버섯은 아닐까?
그렇다면, 독이 조금이라도 빠져나가라고 끓는 물에 데쳤다.
그래도 의심이 나서 꼭 짜서 냉동실에 얼렸다.
먹고 죽더라도 그냥 버리자니 아까웠다.
최면을 걸 듯이 주문을 외듯이 '식용버섯 이기를' 중얼중얼 혼잣말로 기도했다.
다음날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출출해지는 오후에 냉동실에 얼린 버섯을 꺼내어 버섯 튀김을 준비해 가지고 사무실로 향했다. 인터넷에서 배운 대로 멋진 튀김을 만들었다.
대 성공이다.
직원들에게 말을 한 후 먹어 보라고 권했더니 지켜보기만 하고 아무도 안 먹는다.
나 혼자 열심히 먹었다. "맛있다…. 맛있다…. 쩝쩝~" 거리며 먹기는 했으나 향도 너무 진한 것 같고 사실 나도 꺼림직 하긴 했다.
직원들은 빙긋이 웃으며 서로들 눈치만 볼뿐이었다.
그러다가 여직원이 얼른 튀김 두 개를 호일 에 감아 냉장고에 넣는다.

"나중에 먹으려고? 많은데 더 넣지그래?"

"아니 예요, 그게 아니고 무슨 일이 생기면 역학 조사용으로 보관하는 건데요!? 죄송해요."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miss 가 죄송할 게 뭐란 말인가! 식탐 많은 내가 죄인이지. 사실은 나도 쪼끔 꺼림직 하긴 해!"

말한 내가 순간 머쓱해졌다. 결국에는 수고스럽게 만든 버섯 튀김은 버려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몸이 가려운 것도 같고 가려운 곳을 긁다가 모기 물린 자국을 발견하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가뜩이나 근심걱정 많은 요즈음 이상한 걱정을 만들어서 하고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식용버섯과 독버섯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상세하지가않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독이 퍼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거나 장애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날 저녁 9시 뉴스에 독버섯 먹고 일가족3명중 2명 사망이라는 보도가 방송되었다. 내가 먹은 버섯과 비슷한 버섯이 TV화면에 그 로즈 업 되어 비쳐졌다. 뉴스 좀 길게 해주지 후닥닥 지나가서 아쉬움이 남았다. 방송 뉴스 시간마다 채널을 돌려가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가 끝나도록 tv를 보았다. 겁이 덜컥 났다.
이틀이 지났건만 걱정 근심하느라고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지 계속 피곤하고 잠이 쏟아졌다.
퇴근 시간이 되기 전에 사무실을 나와 친정어머니 입원중인 병원으로 갔다.
피곤해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묻는 가족들에게 휴대전화에 저장되어있는 문제의 버섯사진을 보여주며 난 이렇게 말했다.

"나 이 버섯 먹었거든? 독버섯 아닐까? 아마도 독에 걸린 것 같아!"

"모험할 것을 해야지! 직원들은 모두 괜찮아요?"

"응!"

"이틀 지났는데 직원들 모두 괜찮으면 독버섯은 아니었나 봐요. 별일 없으니 다행이예요."

염려를 내려놓으며 돌아서는 아이들 뒷전을 바라보며 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버섯튀김 나 혼자 먹었는걸?"

"이~잉…?"

 
* 송이버섯 목 먹물 버섯 과에 속한 식용 버섯이다.
봄에서 가을에 걸쳐 정원이나 목장 또는 잔디밭 등의 부식 질이 많은 곳에 모여나거나 뭉쳐난다.



2005년 9월 18일 일요일

코스모스 동산에

내가 어렸을 적에는 코스모스 꽃이 피면 가을이라고 했다.
여름날 어쩌다 코스모스 꽃을 한 송이라도 보면 집에 돌아와 자랑삼아 말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삼복더위 속에서도 여기저기 씨 뿌려 가꾼 코스모스 동산을 보면서 가을 아닌 가을 기분을 미리 맛보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를 대변이라도 하는 듯이 계절도 미리 보기를 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외곽 들길을 달리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언덕 배기에 만발한 코스모스 꽃이 시원한 바람과 어우러져 한들거리는 풍경이야말로 눈으로만 바라보기가 아쉬워 입에서 시 낭독하듯이 말이 새어나온다.

`아~ 가을인가!`

아름다운 꽃동산을 그냥 지나치기 섭섭하여 잠시 차를 멈추었다. 삼복더위에 보던 그 꽃의 느낌과는 달랐다. 가을을 마음으로 느끼고 눈으로 확인하고 나름대로 기뻐하고 있을 때 노출된 팔과 다리의 맨살을 간질이며 스쳐 가는 짓궂은 가을바람의 살랑거림은 소싯적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의 그 감정을 되새김하기에 충분했다. 형형색색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곁에는 노랑나비 흰나비의 느릿한 날개 짓도 여유가 있어 보이고 윙윙거리며 꽃 속을 더듬는 벌들의 속삭임과 꽃 속 깊숙이 입맞추는 모습도 질투 나게 정겹다. 구경이라도 하는 듯이 빙빙 돌다 가볍게 꽃잎 끝에 가느다란 다리를 살짝 내려놓지만 꽃잎이라도 찢어질세라 다시 날개 짓하며 다시 공중을 비행하는 고추잠자리의 평화로운 모습도 한 폭의 그림 같은 가을의 선물이다.
코스모스 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릴 적 일이 생각났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음악 시간으로 기억된다.
 
살랑살랑 실바람을 잡아타고서
오색 가을 넘실넘실 넒 날아오네
산에도 들에도 예쁜 꽃으로 수를 놓으며
바다건너 산너머로 가을이 오네
소를 모는 목동들은 노래부르고
코스모스 방실방실 웃으며 맞네
 
선생님께서 쳐주시는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한 소절씩 따라 부른 뒤에 다 같이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울컥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노래는 물론 부를 수 없었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신 선생님이 내 곁으로 오시면서 교실 안은 술렁거렸다. `왜 울어! 어디 아프니?` 머리를 만져보시는 선생님의 근심 어린 염려 앞에 딱히 뭐라 이유를 댈 수 없었다.
`열은 없는데 체했나?`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었고 순간에 배 아픈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한쪽 손은 배를 움켜쥐고 한쪽 다리는 약간 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오만상을 찌그린 채 짝꿍의 부축을 받으며 양호실로 보내졌다.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연극을 하게 되었다. 양호 선생님께서 청진기를 이리저리 옮겨 진찰하시며, `체한 것 같지는 않은데, 배가 아프니? 화장실 안 가도 되니? `감기 몸살인가? 어디 좀 두고 보자.`
 
고개를 몇 번씩 갸우뚱하실 때마다 연극이 들통날까 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선생님께서 누런 알약을 한 움큼 주실 때는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먹어야 했고 검은 가죽침대 위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 시간을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어야만했다. 쉬는 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도 양호실에 오시어 걱정스럽게 쳐다보시며 말씀하셨다.
 
`얼굴이 창백하구나…. 좀 괜찮니?`
 
그때 나의 얼굴이 창백했던 것은 멀쩡한 몸에 한 움큼의 알약을 먹은 것이 불안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의심 많고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나로서는 약을 목으로 넘긴 후부터 진짜 아프기 시작했다. 수돗가로 달려가 쓰디쓴 약물과 뱃속의 있는 많은 것을 토해낸 후에야 양호실에서 잠이 들었고 급기야는 조퇴를 하고야 말았다. 동요를 부르다가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이 목이 메이던 그 어린 날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머리카락 희끗희끗 반백의 모습으로 변해있는 지금, 코스모스 꽃동산에 서서 그 어린 날을 추억하며 그래도 감성만은 그대로 내 안에 살아남아 있음을 스스로 자신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2005년 9월 16일 금요일

며느리 밑씻개



가칠가칠한 가시가 송송 돋아난 이 풀은 옛 선조들의 장난기를 볼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면 일안하고 화장실만 드나든다고 가시가 난 이 풀의 줄기를 휴지 대신 주곤 했다죠.

어머니는 늘 당당하시고 웃음소리가 크시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큰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집안에 활기가 넘쳐나게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골 풍경들,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이야기해 주신다. 
평소 조용한 나는 그런 어머니를 닮고 싶지만 그러나 천성이 조용한지라 늘 어머니는 말씀을 하시고 나는 듣는다. 
오늘도 그랬다. 어머니는 방문을 여시고 음식 만드는 것을 보시면서 "어멈아! 좀 쉬었다 하라고 하신다.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가서 눕는다. 
어머니는 방안에 앉으셨고 나는 방 밖에서 방 문지방을 가운데에 놓고 어머니 무릎을 베고서 누웠다. 이렇게 살 가운 며느리가 좋다고 아버님 살아생전에 아버님께 듣던 칭찬을 어머니가 하신다.
시골 이웃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분명 입도 조금 헤, 하고 벌어진 듯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나 졸음이 쏟아져 오는지 눈을 떴다 감았다 하고 있는데 개심 치레한 눈을 보셨는지 졸리느냐고 물으신다.

"아니에요. 음식 냄새 때문에 눈이 좀 피곤해요. 눈감고 들을 테니 어머니 계속 이야기하세요."

어머니가 크게 웃으면 나도 따라 웃고 이야기하시면 고개도 끄덕여 가면서, 네, 그래요?, 하며 대답은 모두 하면서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있는 상태였으리라.
그야말로 비몽사몽이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 아랫집 영란이네 집에 불이 나서 집이 모두 타고, 소 외양간도 타들어 가기에 처음 그 불길을 보신 어머니께서 "불이야! 불이야!" 하고 소리를 쳤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재연을 하셨다.
때맞추어 밖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무인 경비업체에서 지나갔든지 아니면 응급환자 수송 차량이 지나갔는가 보다.
비몽사몽 중에 '불이야!' 하는 소리가 얼마나 실감나게 들렸던지, 그 순간 놀라서 "어디냐고 소리치며 맨발로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머니도 놀라서 베개를 끌어안고 뛰어 나오셨다.

"아야! 왜 그러니.!"

"불이야! 했잖아요, 어머니가."
그야말로 흥분 상태다.
"하하하!!! 너 잠들었었구나? 들어가서 한숨 자거라."
재미있으신 지 한참을 웃으시는 어머니 한 말씀하신다.

"너희 아버지 살아 계셨으면 너희와 함께 살았을 건데, 너희랑 사신다고 했었는데."

평소 명랑하시고 털털하신 어머니에게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을 보았다. 
어머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한마디 건네고 싶은데 직접 표현 못하는 말을 이렇게 적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채워 드릴 수는 없지만 도시 생활도 무료하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오세요.
'저희는 늘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