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17일 일요일

어느 봄날의 추억



봄이 되면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시댁에 갔던 날이 생각이 난다.
그날은 어느 날보다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시부모님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점심을 먹은 뒤, 남편과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개울가로 나갔다.그이는 쫄 대를 들고 나는 양동이를 들고 신이 나서 종종걸음을 걸었다. 논두렁 옆에 흐르는 도랑이 나오자 신이 난 김에 나는 껑충 뛰었다. 그런데 발 밑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예사롭지 않더니 "퍽"하고 미끄러져 엎어지고 말았다. 양동이는 도랑에 머리를 박았고 무릎에 피가 났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버둥대고있는데 저만치 앞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는 남편은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앞만 향해 전진하는 저 사람이 내 남편 맞나? 정말 얄미워서 부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한참을 가다가 그제야 내 부재를 눈치챘는지 뒤를 돌아본다. 마누라가 이렇게 엎어져 있으면 놀래서 달려와도 모자랄 판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한다.


"뭐해? 빨리 와!"


"나 못 가! 아프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철부지 아이처럼 소리를 질렀고 부랴부랴 달려온 남편이 그제야 물어본다.


"다쳤어?"


"보면 몰라?"


"어쩌다가 넘어졌어. 조심하지!"


"소똥에 미끄러졌어! 똥이 다 묻었어."


"하하, 하필이면 소똥에 넘어지냐?"


"그럼 어디에서 넘어져야돼?"


신경질이 나서 시비도 걸어보지만 남편은 연거푸 웃기만 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얄미웠던 남편이 웃자 금방 내 마음도 풀렸다. 퉁퉁 부은 발목이 일어서지도 못하게 아파 물고기 잡는 건 포기하고 도랑물에 소똥 묻은 것을 닦아내고 그이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두고두고 남편은 그 일을 가지고 나를 놀려댔다.


"소똥에 미끄러져 넘어져 가지고는 손이며 바지에는 똥으로 범벅이 되어 가지고는…."


어찌나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지 이제는 두 손 발 다 들었다. 그런데 작년 봄 어느 날 뉴스에 멸종 위기에 있는 쇠똥구리가 나타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자 남편 야릇한 표정과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 "쇠똥구리? 흐흐흐" 한다.


"쇠똥구리가 뭐?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봐?"


"몰라서 물어? 쇠똥~ 소똥~ 흐흐흐"


남편은 그 저 그 이야기를 몇 번이나 우려먹는다. 쇠똥구리 뉴스에서 또 그 사건을 떠올릴 줄이야! 어쨌든 우리는 그날 맥주를 마시며 또 한번 고향 생각에 젖었다. 소똥에 미끄러져 넘어졌던 사건은 당연히 대화의 화 두였고 그로부터 시작해서 쇠똥구리를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밤 깊어 가는줄 모른다.
올 봄에도 시댁으로 봄나들이를 가야겠다.

2005년 4월 11일 월요일

호텔 커피 마시던 날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녁나절 만나기로 했는데..... 어떤 모습일까? 
남편에게 말을 해야하나? 그이가 알면 혼 날 테니까 일단은 속여야 되겠다.
남자친구를 만난다는 사실이 재미도 있고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어서 일도 못하겠고 싱숭생숭 하다. 분명히 나이를 먹었는데 마음은 스무 살이다. 이러다가 바람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마음은 바람이 들어가서 날라 다니는 것 같다. 그 옛날 어린 날에 했던 너무 웃기는 말들도 생각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해도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했던가? 시 같은 말만 골라서 하고 세상의 고민은 혼자 다 짊어진 듯 바바리 깃을 세우고 온갖 개 폼 다 잡던 친구가 정보처 기관을 통해 나를 찾았다. 친구의 목소리가 잔잔히 떨렸다. 늘 그 앞에서는 비운의 주인공처럼 가녀린 듯 창백한 모습만 보이며 내숭 떨던 나 오늘도 만나면 내숭을 떨어야 하는 건가? 
너무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그 유치하고도 유명한 말을 영화배우 최무룡 김지미 부부보다 먼저 한 사람이 그 친구였다. 그는 왕자님 나는 공주님 이라도 된 듯이 착각 속에 살던 그때는 어른인줄 알았었지만 돌이켜보면 뻔한 생각과 행동들이 웃음밖에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30년만에 만난다니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만나면 손을 잡을까? 
아메리칸 스타일로 포옹을 할까? 
두근거림을 어찌해야 좋을지 감당이 안 된다.

머리는 어떻게 할까.
별로 덥지 않으니 정장을 입을까?
립스틱 색깔은?
속눈썹도 붙일까?'
내가 왜 이러는 거야? 
이옷 저옷 입어보고 붙여보고 그려보고 별의 별 짓을 다하다가 모두 포기하고 꺼내 놓은 옷들을 제 자리에 다시 정리한 다음 원래대로 쌩얼 화장으로 고쳤다. 생 머리 그대로 가지런히 묵고 긴 팔 남방에 주머니 옆이 살짝 헤어진 청바지에 캔버스 운동화를 신었다. 오늘은 완전히 뒷 모습만 대학생이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오전 내내 컴텨 앞에서 여유 부리며 놀다가 오후 내내 들뜬 기분에 시간이 길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점점 다가오니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이려고 거울 앞에 붙어있다. 몸도 마음도 점점 바빠지고 있는데 이때 하필이면 금요일 날 출장 간다는 남편의 보고 전화다.

"그런 말은 집에 들어와서 해도 되는데...나 바빠 끊어요."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도착했다.
친구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택시에서 내리는 나를 보자 친구는 자연스럽게 손도 잡고 어깨도 감싸준다.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할까하고 고민한 상상속에 설정은 괜한 짓이었다. 제 마음대로 붙잡고 안고 다 한다. 누군가는 말했지. 미국에서는 자연스런 인사법이라 괜찮으니 볼에 뽀뽀도 하라고. 생각은 했지만 못했다. 눈이 부신 흰 티셔츠에 미색 면바지 베이지 색 스니커즈를 신은 모습이 참 맑다. 마치 나와 한 쌍의 비둘기 같은 모습이다. 사전 모의라도 한 듯 옷차림이 통일이다. 느낌도 기분도 참 괜찮았다.

"언니는?"

"지금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내일 일 할 사람들과 만나서 횟집에서 미팅중이야. 너 만나면 그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너의 의견은 어때?"

"좋아. 그럼 그리로 가자고... 언니 빨리 보고싶어."

어머니 아버지를 미국으로 모셔가기 위하여 왔다는 남매는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묘지 이장 일이 지연되었다고 했다.
친구는 나의 손을 잡고 호텔 안을 가리킨다.

"잠깐 들어갔다가 가자."

"아~이! 언니도 없는데 호텔 안에를 왜~에 들어가...싫어."

가슴이 뛰었다. 30년의 세월은 어디로 싹뚝 잘려나갔는지 풋풋했던 20대 그 때 처럼 행동하는 친구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면서 나 자신도 20대 감정으로 상황이 흐르는듯 했다. 나를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계속 나를 잡아끌면 나 어떻게 처신하지? 이래서 사람들은 바람이 나는 거야. 나 어떻게 해...) 머리 속은 똑딱거리는 초시간 내에 후다닥 후다닥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잡은 손이 싫지 않았지만 내숭을 떨면서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 로비 오른쪽을 가리키며 하는 친구의 말이 에코를 넣은 듯 스테레오로 들린다.

"기집애...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니? coffee shop에서 차 한잔은 마시고 가야지~이~ 요~ 오~ 오~~"

호텔 커피도 마시고 노량진에서 회와 매운탕을 배가 찢어지게 먹고 들어 왔건만 속이 왜 이리도 허전한 것일까.꿈도 야무지지, 뭘 바랬었기에...? 내 안에 엉큼한 속물 근성이....? 
혼자 큰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하~~"